거창양민학살 억울한 죽음 뒤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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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양민학살 억울한 죽음 뒤처리
  • 한들신문
  • 승인 2020.03.23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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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섭 전 거창사건유족회장

이 기고는 김운섭 전 거창사건유족회장이 거창사건 당시 겪은 경험을 책으로 만든 ‘거창양민학살 억울한 죽음 뒤처리’입니다. 한들신문은 당시 김 전 회장이 겪은 생생한 경험담을 기고로 옮기면서, 생동감을 전하기 위해 책에 사용된 표현까지 그대로 인용함을 알려드립니다.

차 례

특별법 발의(1)

특별법 발의(2)

3당 합당과 문민정부

41주기 4회 합동위령제

다큐멘터리와 한동석의 집(1)

다큐멘터리와 한동석의 집(2)

김종필 선영과 탄원서



특별법 국회에 발의(2)

국회 법사위가 열리는 날 유족대표들은 희망을 걸고 국회 법사위 휴게실에서 제안 설명을 하려고 들어간 김 의원을 초조히 기다렸는데, 제안 설명을 하고 나오는 김 의원의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같은 당 의원에게 화를 내더니 최태현 보좌관에게도 화를 냈다. 유족들은 김 의원의 눈치만 보는데 유보란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허탈하여 물러 나와. 시간을 갖고 재도전을 준비 중이었는데, 김동영 의원이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다.

과로인가 몸살도 날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면회도 안 되고 에이즈니 무어니 몹쓸 유언비어도 돌더니 전립선암이라고도 하기에 의술이 좋은데 별일이야 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김동영 의원은 특별법을 해결치 못하고 1991816일 전립선암으로 서울대병원에서 타계하였다. 서울대학병원 마당에 차려져 있는 빈소에 유족대표로 이철수 씨와 조문을 하고 나오며 아직도 한창 일할 나이인데 거창의 손실이며 우리 일을 해결해줄 사람인데 애석했다. 김영삼 씨의(우 형우) 좌 동영은 영원한 안식처로 떠났다. 199196일 제 3회째 40주기 합동위령제에는 평화민주당 정상용 의원과 박영록 의원이 참석했고 거창 국회의원석은 비었다. 그리고 국회의원 165명이 서명 발의한 거창사건 관련자 명예회복 및 배상에 관한 특별조치법안13대 국회 회기말로 자동폐기 되었다.

그 법을 살려내기 위해 유족회 간부들은 사력을 다하였으나 세상은 아직도 약자의 편은 소수였다. 199164일 자 한국일보에 게재된 백선엽 실록은,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 중에 견벽청야(堅壁淸野)를 기본방침으로 호남 지리산 지구의 빨치산들을 토벌하던 11사단은 거창 양민학살이란 공비 토벌 사상 최대의 오점을 남겼다. 19512911일 거창군 신원면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9연대(연대장 오익경 대령) 3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에 의해 저질러졌다. 장군을 지내고 장관을 한 고급 관료(官僚)가 군의 잘못으로 인정한 실록이다.

 

3당 합당과 문민정부 탄생

1990122일 노태우 정권 민정당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3당이 합당을 하였다. 건국 이래 이승만, 윤보선(장면 내각),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시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노태우 밑으로 들어가 김영삼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3225일 취임했다.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화 운동을 해온 분이라서 민주적 국정 운영을 잘하리라 국민은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전두환, 노태우의 1979년에 발생한 12·12사건은 군사 반란이라고 실체적인 진실을 규명하고도 전두환 노태우와 가담자 34명을 기소유예하는 어정쩡한 결론을 내렸다.

김영삼 대통령은 민족공동체의 와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갔던 12·12사태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 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논리는 설 땅을 잃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권력은 황금을 캐는 도구인가. 전두환 노태우의 부정·비리가 천문학적이라고 연일 신문 텔레비전을 장식하는데 검찰에서는 공소권 없음으로 맞섰다. (언론 보도)

그 나물에 그 밥이라 문민정부는 자식이 죄를 저질러 감옥을 들락거리며, 국가 경제는 아이엠에프(국제 통화기금)에 의지해야 할 만큼 위기에 몰렸다. 야당을 오래 한 정치인은 여당을 견제하는 정치인일 뿐이지 집권할 재목은 아니지 않은가 생각이 든다.

 

41주기 4회 합동위령제

거창(居昌) 양민(良民) 학살(虐殺) 희생자(犧牲者) 영위(靈位)합동 위령제(合同 慰靈祭) 4회째를 맞이하는 1992826. 박산 묘역 뒤편 예비군 훈련장이었던 곳에서 엄수되었다. 1부 행사인 합동위령제의 제수와 모든 준비는 유족회에서 하고 헌관은 기관단체장이 맡아 했다. 2부 행사는 추모식으로 금품제공 협의로 구속되어 옥중 당선된 이강두 국회의원, 평화민주당에서 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꾼 정상용 의원 김말용 의원이 참석하여 추모사를 통해 하나같이 특별법제정에 앞장서겠다고 했다.

특히 정상용 의원은 연 3년째 행사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준 데 대하여 고마웠다. 합동위령제가 끝나면 9~12월까지 정기국회가 열린다. 13대 때 회기 말로 자동 폐기된 특별법을 김영삼 대통령은 야당 때 해결해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초선인 이강두 의원이 힘이 없어 정기국회에서 유보가 되었다. 울화가 치민다. 법적으로 국가의 잘못으로 인정한 거창양민학살사건을 유족들이 애걸해야 하는지, 개만도 못한 정부와 입법부가 한심스럽다. 한 많고 억울한 거창학살 언제까지 외면만 할 것인지 죽은 자는 구천을 헤매고 산자는 슬픔의 나날 위정자(爲政者)들이여 사회저변(社會底邊)에서 고통받는 국민을 왜 외면만 하는가?

다큐멘터리와 한동석 집(1)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겠다고 케이비에스(KBS)한국방송 권오석 피디(PD)라면서 전화가 왔다.

그렇지 않아도 우울하고 분통이 터지는데, 텔레비전을 통하여 전 국민에게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리라, 199354일 신원면으로 권 피디(PD)가 서울에서 찾아왔다. 나는 그를 청연, 탄량, 박산 학살 터와 박산 묘역으로 안내하여, 지인들에게 들은 이야기와 청연에서는 살아난 이야기들을 설명해 주었다.

이에 앞서 케이비에스(KBS) 추리작가 이환경 씨가 취재하러 왔을 때는 허름한 집에서 자고 아침에 노모가 수제비를 내놓기에 의아해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반찬이 없어서 그런 것을 작가에게도 미안하고 노모에게도 미안하여, 이번에는 거창읍으로 나와 음식 대접도 하고 여관비도 내려고 하였는데 한사코 거절한다. 둘이서 여관에서 자면서 거창사건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이튿날은 55일 어린이날이었는데, 권 피디(PD)의 차를 타고 상경하면서, 한동석 집에 가보자고 제의를 하였더니 생각이 같아, 안양에 사는 홍장희 유족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여 <월간조선> 김재명 기자가 알려 준 대로 안양역 앞 본 백화점 옆 골목에 한양 슈퍼마켓 3층 건물을 쉽게 찾았다.

1층은 슈퍼마켓이고 3층이 살림집이었다. 살림집으로 화강석 계단을 오르는데 다리가 후들후들하고 가슴이 두근두근 현기증이 났다. 흉악무도한 자와 만난다는, 철천지원수와 마주한다는 공포감이 현기증을 일으켰다. 현관문 앞에서 숨을 가다듬고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안에서 누구세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한 사장님 댁이지요?” “그런데요?” “방송국에서 나왔는데 잠깐 뵐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인지 용건을 말하란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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