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아 선교사들의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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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선교사들의 흔적을 찾아서
  • 한들신문
  • 승인 2020.03.24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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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푸른 눈의 ‘외국인’들, 거창의 근대 교육과 복지를 이루다

1914년 어느 날, ‘푸른 눈의 외국인이 경남의 서북쪽 산골 마을 거창죽전마을을 찾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스키너(Miss A. G. M. Skinner)와 에버리(Elizabeth M Ebery) 선교사다. 당시 거창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던 그들의 눈에 암담한 거창의 현실이 비쳤다.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말라버린 아이들, 무언가를 가르칠 사람도 공간도 없는 교육 환경 그리고 홀대받는 여성들.

1913, 거창에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거창 선교부가 들어서고 스키너, 스코트, 타이트, 딕슨, 클러크, 맥카그, 엘리자베스, 오맨, 엘리스, 위더스, 에버리 등 11명의 여성 선교사들이 거창을 근거로 인근 함양과 합천까지 폭넓게 활동하며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 교육, 의료 등 여러 방면에서 사회사업을 펼쳤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뱃길로 40, 낯설고 열악한 타국에서 젊음을 바쳐 문명의 빗장을 연 것이다.

이들은 죽전마을 언덕에 명덕여학교, 유치원, 유아 복지 클리닉, 진료소 등 기관을 설립, 사회적 약자를 중심으로 근대식 교육을 시작했다. 특히 스키너 선교사는 거창에서 교육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여자 선교사였다. 원래는 초등교육 수준의 보통 학교를 설립하려고 했으나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어 강습소라는 이름으로 교육 활동을 시작했다. 교육 내용은 보통 학교와 비슷했으며,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성격이 강했다.

스키너 선교사의 후임으로 스코트 선교사가 거창에 왔다. 영국에서 출생한 스코트는 21년간(1920~1941) 거창에서 유치원, 보육원, 명덕 강습도 등의 교육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래서 거창 주교(The Bishop of Kuchang)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많은 시간을 유치원 교육을 위해 할애했다.

또한, 클러크 선교사는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주로 거창에 거주하면서 교회 안에서 여성 환자 보살피기와 간호 등을 제공하였다. 그 후 1932년 한국 선교협의회에서 딕슨 선교사를 초빙하여 1933년에서 193611월까지 거창에 근무하면서 유아 복지 클리닉을 운영했다. 그는 193611월 진주로 이전해서도 일주일에 한 번 거창으로 와서 유아 복지 클리닉을 지도하였다.

죽전 마을 언덕 위의 초가와 선교사 사택 (1930년대)
죽전 마을 언덕 위의 초가와 선교사 사택 (1930년대)

 

하지만 사립 학교의 교육에 일제의 간섭이 심해지자 외국인 선교사들은 학교를 폐쇄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많았다. 명덕 여학교는 1938년에 거창 교회가 경영권을 인수했는데 1939년 말 당시 교사는 3명이었고, 학생은 6학급 150여 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로 그해 휴교령이 내려졌고 1941년까지는 명맥을 유지하다가 선교사가 강제 추방되면서 문을 닫았다.

거창읍 죽전에 있었던 선교사들의 사택
거창읍 죽전에 있었던 선교사들의 사택

거창읍 죽전의 현재 샛별초등학교 자리는 당시 선교사 사택과 교육 시설이 있던 곳이었다. 1960년대 초반까지 거창고등학교의 교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정작 지역 사회에선 이런 역사의 흔적마저 사라지고 희미한 옛 사진으로만 확인 할 수 있으며, 작은 안내문조차 없는 실정이다.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하기까지 27년간 선교사들의 헌신적 활동은 거창의 근대 교육과 복지의 주춧돌이 되었으며, 오늘날 교육 도시거창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요즘 거창읍 죽전에는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죽전을 대표하는 자연적인 문화자원이 대나무라고 한다면 역사적인 문화자원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오스트레일리아 선교사의 사택과 교육기관일 것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거창은 개항장이나 큰 도시가 아니어서 외국 공관 계통의 건축물이나, 선교사를 통해 들어온 외국인의 종교시설, 공공시설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제강점기에 문학인들이 쓴 소설 등에서 “2층 벽돌 양옥집이 도시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음을 볼 수 있는데, 이 시기에 거창에는 이러한 형태의 주택이 지어지지 못했다. 이런 형태의 집을 잘 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봐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재료 구매나 축조기술도 없고 기술자를 데려오기도 힘들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대구시 중구 동산동에 있는 스왓츠 주택은 미국인 선교사였던 스왓츠가 기거하던 집으로 1910년 이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대구의 근대문화유산으로 선교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거창에서도 거창읍 죽전마을 언덕에 오스트레일리아 선교사들의 사택과 교육기관을 다시 복원해서 역사 문화자원으로 활용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실적인 예산 안의 범위에서 부지를 확보한 뒤에 옛날 사진 자료를 참고하여 우선 옛 건축양식(양관)을 따라 2층 목조와 벽돌집을 복원하고 이를 통해 거창의 근대 교육과 복지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역사 교육 현장으로 활용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곳을 중심으로 방문자센터, 근현대 책공방, 북아트센터, 근대역사 문화체험관, 거창의 독립운동과 근대 교육, 복지 전시관 등으로 활용하면 거창의 근대역사 문화공간이 새로운 도시의 상징으로 창출될 것으로 기대한다.

거창읍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지어진 근대건축물이 개발이라는 핑계로 제대로 보존이 안 되고 대부분 철거되고, 지금은 거창읍 중앙리 창조거리를 중심으로 일부가 남아있다. ‘죽전마을의 선교사 사택과 교육 시설 복원은 새로운 형태의 관광 자원 등 볼거리를 제공하고, 근대유산에 관한 관심 유도로 근대역사 문화자원 보존의 새로운 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일은 소수의 사람과 특정 종교계만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00여 년 전 오스트레일리아 선교사들이 우리를 위해 헌신했듯, 그들의 흔적을 다시 복원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거창읍 죽전에 있었던 유치원의 선교사와 아이들 (1920)
거창읍 죽전에 있었던 유치원의 선교사와 아이들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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