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 잔을 마시다】여보! 비가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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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잔을 마시다】여보! 비가 와요
  • 한들신문
  • 승인 2020.08.1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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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편지 집배원 염민기, 시인)

여보! 비가 와요

신달자

 

아침에 창을 열었다

여보! 비가 와요

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

가벼운 말들이 그립다

오늘은 하늘이 너무 고와요

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

그저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소한 일상용어들을 안아 볼을 대고 싶다

 

너무 거칠었던 격분

너무 뜨거웠던 적의

우리들 가슴을 누르던 바위 같은

무겁고 치열한 싸움은

녹아 사라지고

 

가슴을 울렁거리며

입이 근질근질 하고 싶은 말은

작고 하찮은

날씨 이야기 식탁 위의 이야기

 

국이 싱거워요?

밥 더 줘요?

뭐 그런 이야기

발끝에서 타고 올라와

가슴 안에서 쾅 하고 울려오는

삶 속의 돌다리 같은 소중한 말

안고 비비고 입술 대고 싶은

시시하고 말도 아닌 그 말들에게

나보다 먼저 아침밥 한 숟가락 떠먹이고 싶다

 

*정지용의 시 향수에서 인용.

『오래 말하는 사이. 민음사』


420년 전 조선 중기 무덤에서 편지가 발견되었다. 가슴 품에 고이 간직된 만사(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심정을 적은 글). 먼저 간 남편을 애절하게 그리는 원이 아버지에게라는 아내의 편지글에 이렇게 적혀있다.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중략)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남녀가 유별한 시절에도 그리했다. 자세히 말하고, 자세히 듣고, 자세히 보는. 사소하고 시시하고 말도 아닌, 그 일상용어들을 많이 할 때가 오래 말하는 사이의 가장 원활한 소통. 가장 원만한 사랑이 아닐까. 아주 가끔 다시 아내이고 싶다고 말하는 시인의 사부곡을 듣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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