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소중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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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소중하되.
  • 한들신문
  • 승인 2022.05.10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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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연구공간 파랗게날 대표연구원)
2012.02.29 이이화
2012.02.29 이이화

 

2011년 첫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를 마련하며 드는 생각이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여 년이 흘렀다. 역사는 진전하고 사람은 깊이를 더했는가? 그해 12월 마지막 토요일 눈 덮인 영승서원에서 마련한 강좌 <문학자 매천 황현의 역사가로서의 지성>에서 부산대 한문학과 김승룡 교수는 그 을씨년스런 풍광 때문이었던가 고약한 역사는 되풀이된다.” 하였는데, 그래서 더더욱 인문학의 고갈을 멈출 수 없다고 다짐했는데, 과연 그런가? 역사의 진전을 바라며 거침없이 나아가야 한다는 결기를 다지는 시절이 다시 온 것이다. 10년을 돌아보자니 마음 한켠이 서늘하다.(2012229, 한겨레신문 시론, ‘소중하되 정작 잃고 살아가는 것’)

 

인간사 몹시 꼬여도 시절이 어찌 멈추랴. 이 엄동설한에 어느덧 우수 지나, 겨울잠에 빠졌던 만물이 깨어난다는 경칩이 바로 저기다. 삭풍이 할퀴어 가도 잎 되고 꽃 되려는 내 안의 파란 날은 살아남아 꿈틀거린다. 흐르는 시간에 얹힌 나는 어디로 가는가? 늦은 밤 돌아오던 길 멈춰 서 올려다본 막막한 하늘, 거기서 나를 만난다. 광막한 우주 어딘가에 한 점. 존재하는 것이다. 흩뿌린 뭇별 사이 초승달이 꽁꽁 언 하늘을 한 짬 가를 때 정처 없던 별똥별이 마지막 섬광으로 진다. 아릿한 내 가슴 어느 구석에 돋는 의문. 삶이란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끝 모를 갈증이 인문학으로 이끈다.

말과 글, 문학, 역사, 철학, 예술 등 인간의 근본 문제를 성찰하는 인문학은 인간의 내적 성장을 그 이념으로 한다. 나의 뜻을 너에게 건네는 도구, 상상의 힘을 빌려 표현해내는 허구, 인류의 족적에 대한 의미 있는 인식, 인간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진리 깨침,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창조해내는 인간 활동 등 인간의 내적 공명이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마음을 휘도는 지혜이다. 내 안의 성장은 성찰을 돕고 성찰은 삼라만상의 오묘한 운행을 내 안에 담는다. 그 샘솟던 지혜가 메마르고 성찰이 일그러진 나와 너로 채워진 세상은 어떠할까? 혜안을 곤궁하게 하고 명징한 분별력을 놓치게 하는 것이 허다하다. 현상은 멀리 있지 않다.

경제를 살리겠습니다라는 발림수로 출범한 정권이라면 어떤 필연적인 귀착에 다다를지 일찍이 예상키에 어려운 바 아니었다. 굽이치는 생명의 강을 때 만나 호기스런 토목공사판으로 인식하고, 역동의 민족사에서 단절을 희석시킬 대의에 눈 감고, 강약의 골을 깊이 해 우리 공동체를 약육강식의 정글로 만들고, 진정한 관용을 가져오는 진정한 말문을 막아버릴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하였다. 갑남을녀 허다한 마음에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언설에 솔깃했던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뒤늦게 꿈에서 깨어난 뒤, 생명의 강 본디 그 정취를 되찾기에 얼마나 많은 피땀을 요할 것이며, 흐트러진 동질애를 되살리기에 얼마나 살얼음 같은 사려가 있어야 할 것이며, 부대끼며 살아가는 잘나고 못난 이웃끼리 살가운 정감을 되찾기에 얼마나 맘을 졸일 것이며, 정언직필의 언로를 간추리기에 또 얼마나 쉰 목청을 가다듬어야 할까. 내 안에 울림을 가지지 못한 우리의 업보이다. “그래서 살림살이가 나아졌습니까?”라는 물음에 화끈거리는 건 얼굴만이 아니다.

논하기 껄끄러운 정치가 주변을 두런대며 그러할진대, 코끝에 바짝 들이대며 내 운명을 가늠질하는 이것은 어찌할 것인가? 대로변이건 밭두렁이건 불쑥불쑥 대면하는 이것. 어느 길을 걷건 세상의 커다란 흐름과 궤를 떨치고 갈 수는 없는 법, 만물에 조응하려는 내 안의 꿈틀거리는 이 생명력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나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게 하고, 다른 사람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게 하고, 그리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들 사이 관계를 풍요롭고 숭고하게 만드는 인문학은 당장은 이상이다. 하지만 그 이상을 현실로 끌어오려는 부단한 갈증이 없고서야 인간의 숭고함은 어디서 오겠는가. 솔숲을 거닐어 돌담이 에두른 벽촌 고택에 닿아 움트는 인문학적 시도(cafe.daum.net/blueedge)의 나중 모습이 보인다. 아름다움. 저 고즈넉한 용문사의 은행나무, 광활한 아마존의 세이바, 그 어떤 천년 고목이 한 톨의 씨알 파랗게 날 돋아 굳은 땅 밀치고 세상에 떡잎 내밀어 나지 않은 것 있던가! 쌓인 눈 녹아 고택 처마에 듣는 물방울에 비칠 사람이 그립다. (이이화 / 경남 거창 동호마을 텃밭농사꾼 · 인문학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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