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앙-지방의 내밀한 커넥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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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앙-지방의 내밀한 커넥션
  • 한들신문
  • 승인 2022.06.20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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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신용균

얼마 전, 정권이 교체되었다. 정권 교체기에는 권력자의 변화가 일어난다. 치열한 자리다툼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이때, 기존에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협력했던 인물들이 돌연 경쟁적, 적대적 관계로 변한다. 한고조 유방이 항우를 제압하자마자 부하들이 날마다 백사장에 모여 논공행상을 따지며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 사건은, 조선 시대 선비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반면, 조선 시대 선비라면, 후한 광무제 때 그의 친구였던 엄광이 권력을 탐하지 않고 표연히 떠나 은거했던 사실을, 범중엄의 “엄선생사당기”를 줄줄 외면서 칭송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권교체기의 모습은 비슷하다.

  정권교체를 ‘환국’이라고 불렀다. 환국이 가장 많았던 때는 숙종 재위기였다. 경신, 기사, 갑술년의 환국이 대표적이다. 정권은 서인, 남인, 노론으로 잇달아 교체되었다. 그때마다 많은 인사가 숙청되고 새로운 인물이 권력의 중심에 등장했다. 동시에 이때 지방에 가장 많은 서원이 설치되었다. 서원은 지방 양반의 근거지였다. 중앙 권력의 교체가 심할 때 지방 세력이 성장했다는 말인데, 중앙-지방 커넥션의 결과다.

  요즘 조선 시대 서간문을 공부하던 중, 숙종 때 서울의 양반과 지방의 양반들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글을 보았다. 서간은 편지를 말한다. 물론 한문으로 썼고, 대부분 초서다. 당시 양반들에게 편지 쓰는 일이 일상이었고, 교유관계를 이어가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그만큼 격식이 중요시되었는데, 서간문이 상투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이번에 본 서간문은 예외적으로 구체적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뜻밖의 수확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서간문은 70여 통인데, 서울에 사는 반남 박씨 박태권이 부안의 부안 김씨 김수종에게 보낸 것이다. 박태권은 ‘경화사족’ 출신이었다. 경화사족이란 서울에서 권력과 부를 가진 명망 가문을 뜻한다. 반면 김수종은 지방 양반으로, 재산은 많았으나 권력이 없었다. 둘은 중년으로, 가정을 가졌고, 모두 소과를 준비하는 선비였으나, 확실히 서울의 박태관이 우위에 섰다. 상대적으로 부자였던 부안의 김수종은 박태관에게 때때로 재물과 유람의 비용을 제공했고, 박태관의 지방 농장을 관리해 주는 역할을 “자기 일처럼” 해 주었다. 반대급부도 있었다. 지방에 사는 김수종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박태관이 중앙의 인맥을 동원해서 사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었다.

  둘은 같은 붕당으로 이해관계를 함께했다. 그들이 자기 붕당에 대해 의심을 했던 흔적은 없다. 유교에서는 ‘당(黨)’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즉, 당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자기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허물을 숨겨준다는 인식이었다. 구양수는 “붕당론”에서 붕당을 “군자당”과 “소인당”으로 구분하고, 천자는 군자당을 허용하고 소인당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들은 무관심하듯 했다.

  1706년, 숙종 32년, 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김수종은 아버지 묘를 이장하려고 했는데, 산송 문제가 발생했다. 산송이란 명당 묘지 쟁탈전이다. 김수종이 이장하고자 한 명당은 고부에 있었는데, 이미 그쪽의 권농이 그곳에 몰래 묘를 써 두었다. 권농은 요즘 면장격이다. 김수종은 전라감사에게 소송을 내어 이겨 시신을 파냈다. 그런데 전라감사가 바뀌면서 사정이 나빠졌다. 만약 고부군수가 거부하고 권농이 버티면 이장이 힘들어지게 되었다. 

  김수종은 서울 박태관에게 청탁했고, 박태관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고부군수에 결정적인 영향력이 있었던 민대감에게 서신을 얻으려 사흘 동안 요청했고, 실패하자 이번에는 고부군수와 친분이 있는 관리 이모, 박모에게 청원서를 얻어 부치고, 부안군수 외삼촌에게 편지를 얻어 상여꾼을 지급하라고 했다. 김수종은 훈련대장에게 전라감사에 보내는 협조문을 얻어 발송했다. 중앙정계의 영향력 있는 서인 인맥을 총동원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장에 성공했다. 내밀한 연결고리의 위력이다. 

  정권교체기는 인맥을 동원한 커넥션이 절정에 달하는 때이다. 그리고 정권 내내 계속된다. 특히 지방 세력이 권력자에게 인맥을 통해 청탁해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시도는 일제 강점기 ‘지방유지’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졌다. 수구는 부패와 상통한다. 양심적인 지성의 역할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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