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평화
상태바
일본의 평화
  • 한들신문
  • 승인 2022.08.30 11: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기호 (씨알사상연구원장)

 

며칠 후면 일제강점기로부터의 해방 77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35년간이라고 하지만 임진왜란을 언급 안 하더라도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에게 진압당한 것을 포함해서 생각하면 근대사 50년 이상 우리는 일본에 무참히 짓밟혔다. 매년 8월이 되면 해방의 기쁨보다는 참혹했던 과거 일을 다 기억해서 말할 수 없을 만큼 부끄럽고 창피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이런 치욕스러운 일을 이웃 나라로부터 당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지금 어떤 정신 상태에 있는지 스스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21세기에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전쟁이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물론, 국제적 외교 현실이 그렇게 우리에게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운 정부가 한일 간의 껄끄러운 현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외교장관을 일본에 보내는 등 뭔가를 해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을 뉴스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는 물론 과거사의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 등에 있어서 일본 정부가 순순히 우리 뜻대로 나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현 정부 뜻대로 쉽게 한일 관계가 평화롭게 해결되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역사문제는 쉽게 해결되어서도 안된다. 아베 정권이 들어서고부터 일본은 과거 역사도 그렇고 현재나 미래를 놓고서도 자국의 강력한 국가주의 정책을 더욱 공고히 해가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최고인 강한 일본이 될 때에만 일본은 이웃 나라들과는 물론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부국강병 국가론으로 점점 더 뭉쳐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일본에는 이렇게 태생적으로 강한 국가론만 있었던 것일까? 아시아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던 것처럼 전쟁을 불사하면서 세계 평화를 이루겠다는 억지 전쟁론에 몰입된 전쟁 좋아하는 국가가 진정 일본의 참 모습일까? 

  그렇지만도 않다. 메이지 훨씬 이전 시대부터 태평양 전쟁 후에 이르는 일본의 주요 사상가들에게는 비전(非戰), 반군국주의, 비핵(非核)으로 대변되는 이상적 평화 가치들이 있었다. 일본 최초의 성문헌법을 만든 쇼토쿠태자(574-622)는 불교적 세계관으로 평화의 화(和)를 강조했다. 일본 민본 사상의 선구자인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안도 쇼에키(1703-1762)는 전쟁을 비판하고 계급적 지배 체재를 부정하면서 철저한 군비 철폐론을 주창했다. 그에게 평화는 모두가 자연의 원리에 따라 살면서 서로 차별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전쟁 시기 전후로도 군국주의와 독재정치를 비판하면서 반전과 징병 거부 등의 평화운동은 계속되었는데, 특히 그 당시 일본의 평화주의 선두에는 사회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앞장섰던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고토쿠 슈스이, 사카이 도시히코 등 사회주의자들은 계몽주의 단체인 이상단(理想団)을 만들어 헤이민신문(平民新聞, 1903-1905)을 만들었는데, 그 창간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인류를 박애의 길로 이끌 평화주의를 창도한다. 따라서 인종의 구별, 정체의 이동(異同)을 막론하고 세계에서 군비의 철폐와 전쟁의 근절을 기대한다. 만일 세계만방에 지주나 자본가 계급이 없고, 무역시장의 경쟁이 없고, 재부(財富)의 생산이 많아지면서도 그 분배가 공평해져서 사람들 각자의 삶이 즐거워진다면 누가 그런데도 군비를 확장하고 전쟁을 하려고 하겠는가. 이 비참한 재액죄과(災厄罪過)가 일소되어야 사해동포의 이상이 비로소 실현된다고 할 것이다. 사회주의는 한편에서는 민주주의인 동시에 세계 평화주의를 의미한다.” 이들의 평화주의는 ‘사회주의적 반전주의’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비전론(非戰論)을 결코 멈추지 않으면서,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경제를 다시 전쟁으로 확장시키려 하다가는 미국과도 전쟁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는데 결국 미국과의 전쟁이 현실화되고 말았다. 일본 최초로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일본어로 번역했던 고토쿠 슈스이는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가 1911년 사형을 당했다.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함석헌, 김교신의 스승이기도 했던 일본의 대표적 개신교인 우찌무라 간조(1861-1930)는 청일전쟁이 의(義)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 주변국을 무시하고 일본의 사욕을 고취시키는 해적의 전쟁이 되는 것을 보면서 “전승국의 위치에 서자마자, 그 주안이었던 인방(隣邦)의 독립은 고사하고 오히려 신영토 개척, 신시장 확장으로 전 국민의 주의를 빼앗아 단지 전승의 이익만을 충분히 얻으려고 한다..... 왜 동포 중국인의 명예를 중요시하지 않는가. 왜 인방 조선국의 유도에 힘쓰지 않는가.”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국가의 소명은 부국강병으로 인한 침략주의가 아니라, 화합을 통한 공동의 번영에 있다고 주장했다. “절대적 비전주의”야말로 “평화의 복음”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우찌무라를 계승한 야나이하라 타다오(1893-1961)는 국가가 정의를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국가를 지도해야 한다면서 정의는 국가를 넘어서는 평화 원칙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활동했었던 빈민과 협동조합의 아버지로 불리었던 가가와 도요히코(1888-1960) 목사는 패전 후 성립된 ‘일본국헌법’ 이른바 ‘평화헌법’만큼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세계를 ‘하나의 몸’으로 만들기 위한 국제적인 경제협동조합운동을 주창하기도 했다. 주요 열강들에 좌우되는 UN에 대한 기대를 접으면서 반전평화의 희망을 가지고 세계연방 혹은 세계정부 성립에 애를 쓰기도 했다.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 번이나 올랐던 그는 “교회를 건강하게 해주세요. 일본을 구원해주세요. 세계에 평화가 오게 해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겼다. 

  1954년 자위대 창설 이후 지금 일본은 전쟁포기와 전력불보유(戰力不保有)의 ‘일본국헌법’(평화헌법)을 개정해서, 다시 전쟁할 수 있는 군사국가로의 길로 들어서려고 애를 쓰면서 ‘힘에 의한 평화론’이 득세하고 있다. 해방 77년을 맞는 우리의 현실 앞에 놓인 일본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과연 그들의 귀에 들릴지 모르지만 일본인들에게 크게 말해주고 싶다. 비록 소수였지만 맹목적 국가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인종주의나 힘의 논리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함께 더불어 공생하는 참 평화의 세계를 꿈꾸고 애썼던 당신들의 지극한 선배들이었던 사회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의 평화를 향한 외침의 소리에 다시 귀 기울여 주기를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