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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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
  • 한들신문
  • 승인 2022.11.14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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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숙 조합원

솔직히 말하면 나는 2cm도 안 되는 몽당연필이다. 더 정확히 밝히면 1.8cm이다. 사실 너무 작아서 연필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쌤은 나를 더 이상 깎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볼펜 껍질에 끼워져서 있던 자리도 후배에게 양보하고 지금은 쌤의 필통에서 한가로이 놀고 있다. 
  새 학기가 되면 내가 평생 살고 있는 샛별학교에는 코찔찔이 티를 다 벗지 못한 신입생들이 들어오고 학교는 온통 새 가족을 맞이하기에 바쁘다. 그러면 쌤은 나를 찾아 나를 데리고 아름다운 소년소녀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앉아 있는 교실로 간다. 
  아이들은 나를 잘 알아보지도 못한다. 내가 너무 작기 때문이다. 나만큼 작은 연필을 본 적이 없으리라. 새까만 심이 뾰족이 나와 있고 칼자국 난 나무가 있으니, 분명히 연필이다. 쌤은 나를 자신의 엄지와 중지로 지그시 잡고 아이들이 잘 볼 수 있게 아이들 앞으로 다닌다. 이럴 땐 자랑스럽게 뻐겨야 하는 건데 아이들의 눈부신 눈빛 때문에 나의 볼이 홍당무가 된다. 하지만 나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한 시간 내내 아이들 앞에서 주인공이 되어 아이들이 보여주는 예쁜 모습들을 맘껏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쌤이 나를 교단 앞으로 부르면, 나의 일생을 이야기할 차례가 된다.
  ―아주 먼-먼-옛날에 단군 할아버지가 호랑이랑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개마고원 언덕 베기에서 자라던 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요. 겨울의 눈보라도 이겨내고, 화려한 봄도 보내고, 천둥번개 비바람 치는 여름도 견디고, 쓸쓸한 가을도 참으면서 십 년 백 년 천 년을 살아온 나무가 있었어요. 
  이 나무의 꿈은 무엇이었을까요? 큰 궁전의 기둥이 되는 것? 화려한 가구가 되는 것이었을까? 정말 그랬어요. 나무의 가장 큰 부분은 큰 집을 짓는 기둥으로 갔고 결이 곱고 무늬가 아름다운 것은 가구나 마루, 책상을 만드는 곳으로 갔지요. 나머지들은 제재소에서 조금씩 나누어져서 필요한 곳으로 각자 헤어졌답니다. 그중 아주 작은 조각들은 더 작게 나누어졌어요. 우리는 다른 곳에서 온 나뭇조각들과 함께 캄캄한 창고에서 수년을 때가 오기를 기다렸지요.
  강원도 어느 작은 산골 두메에 수천 년 수만 년 전부터 잠자던 흑연이 있었어요. 어느 날 부지런하고 인내심 많은 광부들이 그 흑연을 캐낸 거예요. 흑연은 기차에 실려서 큰 창고로 갔지요. 그곳에서 오래오래 기다렸어요. 
  흑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요? 대부분은 건전지 만드는 공장으로 실려 가고 얼마 되지 않는 흑연은 다른 곳으로 갔어요. 나머지 흑연은 아주 작고 가는 바늘처럼 만들어져서 가지런히 통에 담겨 있었지요. 그러고도 많은 세월이 흘러갔답니다. 
  그리고 그 후 작은 나뭇조각과 흑연심이 운명적으로 만나서 우리들이 탄생한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의 일생이 시작되었답니다. 우리를 만드는 아가씨들은 우리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집을 만들어 열두 명씩 한 형제가 되도록 해주었어요. 
  우리 형제들은 트럭도 타고, 창고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그러다 서로 흩어지기 시작했답니다. 나의 형제들이 샛별학교 앞 무지개 문방구로 배달됐어요. 그곳에서도 여러 날을 보냈지요. 정말 오랜 세월을 기다렸어요. 그날 샛별학교 신입생 영애가 연필을 사러 문방구에 들어 와서는 5분이 넘게 연필을 골랐지요. 나를 골랐어요! 그러더니 나를 자기 가슴에 대고
“됐어”
하는 거예요. 
그때의 기쁨과 감격은 아직도 생생하답니다.
  그러고는 그 아이 영애의 연필이 되어 영애와의 생활을 시작했답니다. 영애의 수학 문제도 풀어주고, 중요한 곳 밑줄도 그어주고, 사회 필기도 하고, 옆 친구 보름이한테 보내는 편지도 써 주고, 미술시간 데생까지 했지요. 영애가 심심하면 낙서도 해 주고, 늦은 밤 일기도 써 주고요. 나는 참 행복했어요.
  나는 영애가 너무 좋았어요. 영애도 나를 무척 아껴 주었답니다. 그런데 영어시간 옆 반 친구 동선이가 나를 영애의 필통에서 끄집어내어 쓰고는 무책임하게 떨어뜨린 겁니다. 나는 교실 바닥에서 이리저리 밀려다니다가 결국 쓰레기통에 버려졌어요. 너무 울어서 목이 잠기고 기진맥진했지요. 
  나는 쓰레기 더미에 얹혀 어디론가 실려 가고 있었어요. 나의 일생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어요. 죽는 셈 치고 뛰어내렸지요.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 나는 찍히고 부러졌어요. 엉엉 울면서 발버둥을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울다가 지쳐서 졸고 있을 때 쌤이 지나가다가 나를 발견한 겁니다. 쌤은 나한테 묻은 흙을 닦아 주고 밟혀서 갈라진 부분도 잘 다듬어 주었어요. 짧아진 나를 볼펜에 끼워 예쁘게 머리를 다듬어 주었지요. 나는 정말 행운아입니다.―

  나는 상기된 얼굴로 아이들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마쳤다. 아이들이 박수를 쳐 주었다. 영애에 대한 그리움이 찡 묻어났다. 쌤은 나와 아이들의 눈동자를 번갈아 보면서 웃음을 짓는다. 감동을 먹은 아이들의 눈빛이 샛별처럼 반작인다.  
  쌤은 “모든 존재하는 것은 존재의 목적이 있고, 일생이 있고, 사명(?)이 있다.”라고 했다. 또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이 보람 있는 일생을 보내야 우리 사람의 일생도 보람이 있게 된다.”라고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리고 쌤은 뜸을 들이더니 주워 모은 나의 후배들을 한 움큼 교탁 위에 올려놓고 하나씩 들고 진지하게 아이들을 꼬셨다. 
“이 몽당연필 책임지고 일생을 행복하게 해 줄 사람?”
아이들은 서로
“저요! 저요!” 한다.
  샛별학교에는 바닥에 떨어져 울고 있는 연필과 물건이 없다. 그럴라치면 서로 그들의 일생을 책임지겠다고 덤비는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쌤의 필통에서 여유롭게 지내고 있다. 더 이상 재미난 얘기를 쓸 수는 없지만 만족한다. 짧았지만 영애와의 행복했던 시절, 쌤과 아이들과의 만남은 나의 일생을 아깝지 않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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