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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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 한들신문
  • 승인 2022.12.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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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호 (씨알사상연구원장)

 

지구촌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월드컵 축구 경기로 축제 같은 분위기다. 인권이 무시당하고 인종차별이 벌어지는 나라들에 대해서 축구장에서는 선수들의 무언의 항의 행위도 벌어지고 있다. 이태원에서 158명의 젊은 청년들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참사의 슬픔과 고통에 애도의 눈물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광화문에서는 수많은 청년들이 축구 경기에 열광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한마디로 한쪽은 전쟁으로 피눈물과 고통을 겪지만 또 한쪽에서는 운동경기 축제의 노래를 부르는 곳이 우리 인류 사회 지구촌의 모습이다.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참 작은 지구 땅덩어리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역사에서는 전쟁과 평화가 늘 함께 좁은 지구 땅덩어리에서 공존했었다고 할 수 있다. 모순의 역사이기도 한 것 같고, 한편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간세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역시 전쟁과 폭력, 차별의 고통보다는 사랑과 평화, 공감과 연대, 나눔과 돌봄의 문화를 점점 더 깊고 넓고 확고하게 만들어 나가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빨리 진화하는 인간의 특성이라고 할까? 그런데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이후 내년이면 70년이 되는 이 땅에서, 얼마 전 북한 김정은의 동생 김여정은 남한이 핵폭탄의 표적이 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남쪽은 남쪽대로 한미일 군사협력과 훈련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전쟁과 평화의 모순적 현실이 다시 한강토(한반도)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겠다는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의 사람들은 진화가 늦은 것일까? 전쟁은 왜 하려고 하는 것일까?

  전쟁에 대한 사회적 담론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전쟁도 있다는 것이다. 후자는 전쟁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을 수 있다 할지라도 절대악은 아니며,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에서 충분히 생길 수 있고 정당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국가의 생존과 국익을 위해서는 무력이 필요하다는 논리인데, 이 근거는 4세기의 기독교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 (354-430)의 ‘정당한 전쟁 (Just War)’이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가르침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는 기독교인들의 전쟁 참여를 정당화하는 논리적 근거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국가에 대한 개인의 책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국가의 전쟁은 정당한 전쟁 ((Just War)이고, 그래서 이 정당한 전쟁에 참여하는 행위는 국가에 속한 개인의 의무이기도 하고 의로운 행위도 된다는 논리다. 따라서 이러한 정당한 전쟁에서 승리와 방어를 위해 적을 죽이는 행위는 살인행위도 아니고 법을 어기는 행위도 아닌 정당한 행위가 되고, 심지어 상을 받는 일이라고 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와 예수의 가장 근본적 가르침은 원수를 죽이는 것은 물론 원수가 아닌 사람도 정당하게 죽일 수 있는 이상한 논리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이로써 인류 역사는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도 면죄부를 얻을 수 있었고,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일들이 비일비재 벌어져 왔던 것 아니겠는가. 중세 기독교의 십자군 전쟁에서부터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등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기독교가 만든 정당한 전쟁론을 근거로 수많은 나라를 침략하여 선주민들을 살해하고 약탈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정당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제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은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역사상 가장 많은 전쟁을 일으킨 기독교 나라로 기억되고 있지 않은가. 

  국가의 어쩔 수 없는 전쟁이었다는 전쟁에서 군인만 죽는 건 아니다. 양차 세계대전에서 민간인 사망자는 군인사망자의 몇 배나 많다. 한국전쟁에서도 민간인은 군인보다 세배나 많게 죽었다. 미국 국방부 통계에 의하면 아프간 전쟁 시작부터 2020년 5월까지 미군을 포함해 연합군 사망자는 3,502명이었다. 그러나 부실한 통계에도 불구하고 민간인 사망자는 1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2003년부터 2021년까지 이라크 전쟁에서도 민간인은 군인 사망자의 두 배에 해당하는 20만 명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원자폭탄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는 13만 명이 넘는 것으로 계산되고 있다. 한국전쟁 시 1950년 9월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주요 군사지역에 민간인을 동원하거나 민간인 거주 지역을 군사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도시와 마을을 폭격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북한군이 민간인의 희생을 증폭시켰다고 변명했다. 얼마나 많은 남북의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죽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셀 수도 없다. 모든 것이 다 정당한 전쟁론이라는 기가 막힌 전쟁 이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요한 갈퉁이라는 세계적 평화학자는 평화에는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가 있다고 했다. 소극적 평화는 전쟁만 없으면 평화라는 인식을 말하고, 적극적 평화는 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들을 제거해야만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한강토에는 전쟁은 없으니 소극적 평화는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남쪽에서는 한미일이 핵 항공모함, 폭격기 등으로 훈련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소극적 평화 상태의 한강토에 참 평화가 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소극적 평화는 소위 말하는 정당한 전쟁론의 이론에 의해 언제든지 깨어지고 전쟁상태로 들어갈 수 있는 준비단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 평화는 갈퉁이 말한 대로 적극적 평화로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언제든지 정당한 전쟁론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구조적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제거할 때만 평화는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남한의 권력자들이, 국가라는 실체 없는 허상들의 욕망과 탐욕에서 비롯되는 이기적이며 거짓된 언행들이야말로 깨뜨려버려야 할 대표적인 구조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구조적 문제를 없애는 것은, 전쟁이 나면 가장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 개인으로 구성된 시민들이 나서서 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국제 정치인들이 구조적 문제를 없애고 평화를 만들 것을 기대하지는 말자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저들은 전쟁을 일으켜왔기 때문이다. 오직 시민들만이 할 수 있다는 자각이 속히 일어나는 것만이 참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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