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은 말한다-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_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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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은 말한다-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_13
  • 한들신문
  • 승인 2023.01.09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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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법대 한인섭 교수
▲거창사건 생존자 권도술. 본 책에서 발췌.
▲거창사건 생존자 권도술. 본 책에서 발췌.

권도술, 굵은 뼈는 남자, 잔 뼈는 여자로 취급 (3)

…188호에 이어서
부모 자식 일이라 유족회 일에는 안 빠져요
Q> 아까 이장하는 거, 말씀하셨는데요. 이장하기 전에 흙에 파묻을 때 몇 분이 모여서 파묻었습니까?
  정확한 숫자는 모르고요. 100명 이상은 되지요. 서로 연락을 해서 삽가지고 오고, 괭이 가지고 오고 그래가지고 마 안 파묻었습니까?

Q> 그때가 계절이 언제였습니까?
  파묻은 것이 그때 봄이었지요. 군인들이 완전히 떠났다는 소식 듣고 나서 두 달 있다가 묻었어요. 그러니까 죽은 해가 51년 2월이니까 그 해 봄에 일단 흙에 파묻고, 그 다음 3년 지나서 이장을 하고….
  
Q> 이장할 때 경찰이나 이런 데서 간섭하지 않았어요?
  안했지요.

Q> 그리고 무덤의 위치는 어떻게 잡았습니까?
  그때는 나이 많은 어른들이 뭘 좀 알던 모양이라. 박산, 거기다 자리를 잡아가지고 우에는 남자들 산소, 밑에는 여자들 산소로 하고.

Q> 그리고 4·19 전에 함양을 떠나셨고, 그 이후에 유족회나 뭐, 그런 활동에 관여하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 유족들은 일 있으면 언제든 오지 한번도 빠지진 안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부모, 처, 자슥일이다본께네.

Q> 사건 나기 전에 공비나 빨치산이나, 그런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무슨 활동을 어떻게 했다, 그런 얘기는 들었나요? 
  그것들은(그 사람들은) 지난 동짓달에 지서를 습격하고 넘어와서 우리한테 밥 해달라고 하고. 밥 안 해준다고 하면 총으로 쏴죽이려고 그라제. 우리들 가족들도 그때 밥 해주기가 하도 겁이 나서 군인이나 경찰이 와서 우리들 피난시켜주면 좋겠다, 엉기가 나서(짜증이 나서) 그런 생각을 했는 기라.

Q> 집에 와서 뭐, 내놔라 이런 것은?
  그런 것은 없어, 가끔 와서 밥 해달라고. “밥 안 해주면 쏴 죽인다.” 그라는 기라.

Q> 그게 사건 나기 얼마 전까지 그랬습니까?
  신원 양민 학살 전까지 그랬지요. 그 후에는 경찰이 와 있었제. 난리난 그날 (경찰이) 들어왔어요. 양민 학살하고 나서 그때부터 경찰이 들어왔어요. 

Q> 그때는 빨치산들을 뭐라고 불렀습니까? 공비라고 했습니까?
  빨치산이고, 공비고, 그런 건 모르고 빨갱이인 줄 알았지. 무조건 빨갱이인 줄 알았어.

Q> 기록에 보면 전해에 양력 12월 5일에 신원지서가 빨치산들에게 습격당했다고 나오거든요? 그 이야기는 들어본 바가 있습니까? 사건 나기 하루 이틀 전에 지서를 습격했다, 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들도 있어요. 어느 이야기가 맞습니까?
  빨갱이가 습격한 건 사건이 나기 한 몇 달 전이었을 겁니다. 경찰들이 못 이기니께네 후다닥 나와버리고, 군인이 와서 빨갱이들을 쫓아내고 나니까 그때부턴 경찰이 들어와 있었지요.

Q> 중유에서 학살이 있기 전, 청연에서 이미 100명이 죽었잖아요? 그 소문이 안 돌았습니까?
  소문을 언뜻 들었어요.

Q> 그러면 군인을 보면 도망을 가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께 모두 병신들이죠. 그때 우리 재종이 공군에 갔었어요. 그래 말을 들으니 김종원이 비서라네. 그래서 더 원통한 기라. 우리 재종이 내가 이사하고 나니께 “아이구 내 말만 하면 살긴데….” 해싸. 할 수 없는 기라. 

-권도술 편 끝-

 

▲거창사건추모공원에 있는 위령탑. 본 책에서 발췌.
▲거창사건추모공원에 있는 위령탑. 본 책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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