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화양연화(花樣年華)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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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화양연화(花樣年華)5
  • 한들신문
  • 승인 2023.04.1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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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소설가)

 
삽화 : 김녹촌
삽화 : 김녹촌

영화 <화양연화>의 마지막에서 차우는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비밀을 앙코르와트 석벽에 봉인함으로 과거를 그곳에 묻었다. 우리나라에도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픈 비밀이 있을 때 땅에 구멍을 파고 덮는 설화가 있듯, 차우도 앙코르와트 사원의 구멍에 아픈 사랑의 기억을 담고는 막아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막고 있던 구멍에 풀들이 자라고 바람이 불어와 봉인된 구멍을 연다. 아무리 잊으려 노력해도 과거는 봉인을 뚫고 새어 나와 현재의 삶에 달라붙는다. <2046><화양연화>에서 봉인했던 사랑이 새어 나와 여전히 그들을 맴도는 이야기인 셈이다.

 

4. 앙코르와트의 화양연화

영화 <2046>에서 허무와 불안, 상실의 이미지들이 물처럼 흘러가듯, 그 당시의 나 역시 짊어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에 짓눌려 그냥 시간만 흘러가게 방치한 채 겉늙어가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화양연화는 사치스러운 허상이라 생각하며 모든 것을 체념했다. ‘(아상我相)’를 버리지 않고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가 힘들었다. 나는 를 버리는 연습을 끊임없이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어낸 ()’가 주는 평화로움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지니게 했으며, 나를 얽어매던 올무들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때로는 진리가 주는 자유비슷한 기쁨도 곁눈질할 수 있었다. 이는 그 이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희열로, 그동안 맛보았던 그 어떤 기쁨보다 나를 충일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의 나는 소위 텅 빈 충만속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턴가 나는 나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점차 무념무상의 적요와 안온함에 젖어들면서, 모든 소소한 것들에는 무관심하고 냉담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치열하게 사랑하고 치러내야 할 일에서조차 나 자신을 소외시키고, 텅 빈 그 자리를 그냥 그대로 비워 둔 채 방치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초월한 체하는 날조된 관조 속에, 턱없이 속세를 초탈한 듯한 교만함까지 생겨서 점점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상은 버렸지만, 버린 그 자리에 진정 채워야 할 것에는 인색했다. 어느 날 문득 그러한 나를 발견하면서, 나는 나 자신의 모습에 질렸고 그런 내가 무섭기조차 했다. 만나는 대상을 관조적으로 대하는 척했지만 기실 그것은 패배적이고 냉소적인 태도에 불과했고, 내 가슴은 차갑게 식고 딱딱하게 굳어 화석화돼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나의 앙코르 와트로 떠나고 싶었다. 그리하여 갈수록 삭막해져가는 나 자신을 도발해, 아프지만 아름다웠던 삶의 여정과 사랑에 대한 기억들과 판야 나무뿌리처럼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를 되돌아보며 나아갈 방향을 새롭게 모색하고 싶었다. 그리고 과거의 시간들을 기억하면서 현재의 화양연화를 다시 꿈꾸고 싶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의 판야 나무뿌리는 더욱더 뻗어나가고 나의 사암 벽돌도 삭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나는 캄보디아 씨엠레아프 앙코르와트를 향해 떠났다.

앙코르와트의 허물어진 돌무더기 사이, 숨겨졌던 사원의 긴 회랑에 섰다. 회랑 안에는 햇살이 비쳐들고 사원 깊숙이 파고든 판야 나무의 뿌리가 드러나 있었다. 끊어졌나 싶어 돌아서면 다시 이어지는 회랑과 회랑 내부에 쌓인 사암 조각들, 그 안에 부조로 선명하게 새겨진 다양한 표정의 무희들... 무너져 내리는 돌무더기 속에서 아직도 춤을 추고 있는 그 무희들을 바라보았다. 나무뿌리는 끊임없이 촉수를 뻗어 사암 속으로 파고들지만 무희는 여전히 천 년의 세월 동안 농염하고도 황홀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화양연화였다. 고통받고 있던 순간들이 매우 느리고도 고통스럽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꼈지만 실은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던 차우와 리첸처럼, 나 역시 지금 나의 이 시간들이 가장 귀하고 소중한 순간임을 다시금 생각했다.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무희들 위로 새들이 날아와 노래하고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잠시 정지했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있었다. 마음속 승려가 해맑게 웃으며, 채 백 년을 채우지 못하는 인생살이에 엄살 부리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주어진 매 순간이 화양연화의 절정이라고 말했다. 앙코르와트 사원의 나무와 돌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아름답고도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여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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