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로 가는 길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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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로 가는 길 II
  • 한들신문
  • 승인 2023.10.1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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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소설가)
▲삽화 : 박혜리(한국미술협회 회원)
▲삽화 : 박혜리(한국미술협회 회원)

외가로 가는 길에는 늘 자전거 한 대가 그림처럼 떠오른다.

  달빛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 위에 한 가장이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다. 안장 앞 지지대에는 두 딸이 나란히 앉고 뒤쪽 짐칸에는 아내가 어린 아들을 안고 탔다. 자전거 안장에 앉은 가장은 온 가족의 체중을 자신의 두 다리에 싣고 땀을 뻘뻘 흘리며 페달을 밟는다숨이 턱에까지 차오르는 가장의 호흡이 가쁜 만큼, 또한 그것이 가슴 벅찬 기쁨이었음을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한 총각 선생님이 오래도록, 어릴 때부터 예쁘고 영특하던 여자아이가 아름다운 아가씨가 되는 모습을 아름답게 지켜보았다. 그 아가씨가 장성하자 총각 선생님은, 그녀를 향해 동네방네 소문이 쫘하게 퍼지도록 구애 작전을 펼쳤다.

  달빛 가득한 밤이면 달래강의 강물에 세레나데를 담은 휘파람을 실어 보내고, 연모하는 이가 사는 동네와 그 아가씨가 사는 집을 화폭에 그려 보냈다. 그뿐만 아니라 여름날 밤에는 흐드러지게 피어 길을 밝히는 달맞이꽃 길을 걸어 사랑하는 이의 집 앞에 가 닿곤 했다. 살 에는 바람이 부는 겨울엔 연인이 오가는 길목에 기다리고 서 있다가 가슴에 품어둔 따끈한 붕어빵을 꺼내주었다. 그렇게 살뜰히도 사랑한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 가정을 이룬 그 남자에겐, 딸과 아들 또한 최고의 보배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말이면 그 보배들을 가슴에 하나 가득 안고 싣고 아내의 옛집을 찾곤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물자가 귀한 시절에 자전거는, 여염집에서는 최고로 편리하고 값진 운송수단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주말이면 자전거 앞뒤에 아내와 아들, 딸 둘을 싣고 페달을 밟아 외가로 향하곤 했다. 그리고 십여 리가 넘는 그 길 내내 우리 가족은 자전거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노래를 불렀다. 때때로 나는, 프레임 위에 앉아있는 특권으로 핸들 옆에 달린 자전거 요롱을 신나게 울렸다.

  숨이 가쁘고, 다리가 뻐근했겠지만, 나의 아버지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니 내색하지 않은 게 아니고, 정말로 행복감 때문에 피곤함을 잊었을 수도 있다. 그때의 아버지는 그렇게 믿을 정도로 기운 넘치고 즐거워 보였다.

  외할머니의 음식솜씨는 고위직 관료를 접대하는 도지사 집에 최고 주방 마님(요즘으로 하면 셰프)으로 초빙될 정도로 빼어났는데, 그 솜씨에다 외할아버지가 일군 과수원에서 나오는 갖가지 과일과 채소들, 그리고 달래강에서 잡아 온 온갖 물고기로 만든 밥상은 늘 풍성하고 맛깔스러웠다.

  학마을의 들판과 언덕, 강가의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면서 넉넉한 주말을 보낸 우리는 달빛을 받으며 그 길을 다시 내려오곤 했다. 역시 온 가족이 아버지의 자전거에 가득 올라타고서였다. 막내아들은 엄마의 품 안에서 잠이 들고 작은딸도 지지대 위에서 꾸벅꾸벅 졸 때가 많았다. 그러면 아버지는 안장 앞에 걸터앉은 딸들을 한 손으로 감싸 안아가면서, 자신이 일군 집을 향해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십리 길을 나아갔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휘파람을 부를지언정 단 한 번도 힘들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제 그 아버지도 떠나가신 지 오래되고 함께 자전거를 탈 동생도 멀리 떠나 바다 건너 산다. 각기 자기의 차를 지니고 그 차에 자신의 가족을 태운 채 각자의 길을 달려가는 삶이 되었다. 온 가족이 모두 한 자전거에 탈 수도 없지만, 그때의 아버지처럼 휘파람을 불며 그 길을 나아가기에는 산다는 게 참으로 힘겹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가슴에 쓸쓸한 바람이 한차례 불고 갈 때면 그리고 삶의 짐이 무겁게 느껴질 때면, 그때 외가로 가던 그 길 위에 내 마음을 데려간다. 그러면 그 길 위에 가득하던 동생들의 노랫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엄마가 아버지에게 그날 일어난 일들을 조잘조잘 들려주던 말소리, 경쾌하게 울려 퍼지던 요롱소리, 턱에까지 닿던 아버지의 가쁜 숨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내 삶의 무게와 아버지의 허벅지와 가슴이 감당해야 했던 그 삶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아리도록 밀려오는 그리움과 함께 마음의 위로를 받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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