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소할 곳은 하늘밖에 없다”
상태바
“내가 공소할 곳은 하늘밖에 없다”
  • 이종철 기자
  • 승인 2023.12.06 15: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내용은 독립운동하시다가 파리 장서 사건으로 일제에 발각이 되어 옥고를 치르시는데, 그때 재판에서 2년 선고를 받았어요. 그때 하신 말씀입니다. ‘이번 재판장에서 나는 살아서 돌아갈 기약을 하지 않고 여기에 왔다. 왜 종신 징역을 선고하지 않고 하필 2년이냐’. 그러자 그 판사가 2년을 불복을 할 것 같으면 항소를 할 수 있다라고 하니까 내가 왜 너희들한테 이렇게 무릎을 꿇고 뭘 부탁을 해야 되느냐. 내가 공소할 곳은 하늘밖에 없다이렇게 아주 기개가 넘치는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추운 날씨 탓인지 추상같은 선생의 의기 때문인지 문화해설사의 목소리도 언뜻 떨리는 듯했다.

  전시관은 거창군 가북면 동촌길 39번지(중촌리 1807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지난 825일 개관하였다. 쌀쌀한 초겨울 늦은 오후에 전시관을 찾았다.

  전시관에는 관리 및 문화해설을 담당하는 해설사 한 분이 유허지와 전시관 두 곳을 책임지고 있었다. 어둑한 전시관 내에서 문화해설을 담당하시는 분의 안내를 따라 옛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섰다.

  면우 곽종석 선생은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주도한 유학자로 알려져 있다. 191931일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이 주도하여 3·1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미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가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 면우는 유림이 늦게라도 파리강화회의에 독자적으로 독립청원서를 보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수백 년 반목해온 유림(儒林)들이 학파의 벽을 허물고, 곽종석 선생을 필두로 대표 137명이 1919412일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여 이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다.

  ‘파리장서는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가 모두 2,674자에 달하는 긴 글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장서는 인간이 강약의 세력으로 나누어져 강자는 약자의 생명을 위협하며 다른 나라를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고 있다..... 만약 천지의 본마음으로 천하가 대동(大同)으로 돌아간다면 만물이 각기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힘에 의한 지배를 극복하고 인류애를 바탕으로 평화롭게 살아가자는 내용으로 이해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유교(儒敎)계 인사들이 체포되어 옥고(獄苦)를 치렀다. 당시 이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곽종석 선생이다.

  담당 해설사는 선생과 거창의 인연에 대해 “1846년에 태어나셔서 1919년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니까 180여년 전에 태어나셨고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쯤에 돌아가신 거죠. 74세를 사셨는데 여기 거창의 다전마을(중촌 마을)51살에 오셨어요. 51살에 여기에 정착을 하시고, 여기서 후학들을 길러내시면서 이제 독립운동을 하신 거죠.”라고 설명했다.

▲면우 곽종석 선생 유훈
▲면우 곽종석 선생 유훈

 

君子當爲萬世謀 不可爲一時計

  바닥에 표시된 방향표지를 따라 관람을 하다 보면, 곽종석 선생의 말씀을 옮긴 액자를 만난다. 해설사는 면우 곽종석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놓고 한 마지막 유훈이래요, 유훈. 면우문집 시집에도 나오고. 마지막에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인데, 군자는 마땅히 만세(멀리)를 내다보고 일을 도모를 해야 되지, 짧은 일시적 계산을 가지고 생각을 하지 마라. 이런 뜻이에요.”라고 했다.

  전시관 한 켠에는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기증한 역사

▲면우 곽종석 선생 초상화
▲면우 곽종석 선생 초상화

 

관련 도서 1300여권이 전시되어 있다. 대출은 할 수 없지만, 전시관 내 마련된 탁자에서 읽어 볼 수 있다.

  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다시 보니 전시관의 단아하고 하얀 벽, 낮은 자세로 단정히 앉은 외관에서 조선 유학자의 곧고 맑은 정신이 배어 나왔다. 초야에 묻혀 몸을 낮춘 선비의 고고함은 시대의 어둠을 외면하지 않았다.

  전시관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허지에 들르면, 선생이 쓰시던 여재와 인재가 새롭게 복원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선생께서 24년간 사시면서 후학들을 양성하던 곳이다. 고종 황제께서 면우 선생을 경국지재즉 나라를 이끌어갈 만한 재목이라면서 벼슬을 계속 하사했는데, 모두 마다하시고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헌신하셨다고 한다.

  선생의 호는 면우. 숙이고 들어가는 집이라는 뜻이다. 어디 가난한 형편 때문만이겠는가? 가난해서 처마가 아주 낮았기 때문만이겠는가? 전시관에서 선생의 자취를 엿보고 나니, 옛 스승의 곧은 선비정신과 뜨거운 애국심에 새삼 고개 숙여 옷깃을 여미게 된다.

  건립된 지 얼마되지 않아 아직은 관람객이 드물다. 관광명소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주변 문화관광지와의 연계성을 강화하고, 포토존, 체험존을 마련하는 등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해 보완해야 할 것이다. 곽종석 전시관이 역사 교육의 장으로 널리 알려져 거창의 선비정신이 후세에 계승되는 소중한 현장으로 발전되었으면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