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ROMA)의 준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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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ROMA)의 준순이
  • 박혜원(소설가)
  • 승인 2023.12.2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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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마' 의 포스트
영화 '로마' 의 포스트

내가 어릴 때는 동네 어느 집이든 사람들이 벅적벅적했다. 보통 한 집에 아이가 대여섯 명인데다 시부모, 심지어 시조부모까지 있는 집도 있고, 그러다 보니 결혼하지 않은 삼촌, 고모들까지 함께 살기도 했다. 어떤 집에는 며느리가 아기를 낳았는데 시어머니까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산해서, 어린 삼촌과 형 같은 조카가 한집에 살기도 했다. 좀 살만한 집에는 큰집, 작은집 뿐 아니라 곁다리 식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자산이라도 있는 집에는 머슴과 식모가 딸려있었고, 때로는 업순이까지 있어 그야말로 온 동네 가득 사람들이 넘쳐나 골목골목이 뛰어노는 아이들과 등하교하는 학생, 일꾼과 장돌뱅이, 오가는 길손들로 분주했다. 그러다 보니 남는 일손도 많아서 아이들은 온 동네 사람들과 더불어 이 손 저 손을 거쳐 가며 쑥쑥 잘도 자랐다.

우리 외가에도 외할아버지가 다리 밑에서 주워 와 키웠다 해서 준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벙어리(그 당시엔 언어장애인을 그렇게 불렀다) 언니가 있었다. 귀도 들리지 않고 말도 못 했지만 아주 영민하여 약방의 감초처럼 집 안팎의 허드렛일을 도왔다. 외가에는 제법 큰 과수원과 논이 있었는데, 준순이는 머슴과 함께 그 일도 곧잘 도왔을 뿐 아니라, 집안을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심지어는 아이를 돌보는 일도 척척 알아서 잘했다.

우리는 삼 남매였는데, 엄마 아빠가 모두 일을 했기 때문에 어릴 때는 번갈아가며 한동안 외가에서 자랐다. 그런데 아이들이 말할 때가 한참 넘었는데도 말은 못 하고 손짓발짓만 열심히 해서 어른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쁜 어른들 대신, 준순이랑 같이 놀다 보니 말을 제대로 배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일상적인 말 대신 손과 발, 몸짓과 눈치로 소통하는, 소리 너머 세계의 언어, 침묵의 언어를 익히는 참으로 아름답고도 특별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로마(ROMA)>2018년 제75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감독상, 촬영상 등 수많은 상을 휩쓴 작품으로, 멕시코 감독 알폰소 쿠아론이 그의 어린 시절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가사도우미 리보 로드리게즈에게 바치는 헌정 영화이다. 제목 로마는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인 멕시코시티의 Colonia Roma(콜로니아 로마)에서 가져온 것이다.

영화는 로마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인디오 클레오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영화 속 로마는 아침마다 분주하다. 거리마다 인디오들이 집 앞을 쓸고 빨래를 하면서 백인 아이들의 등교를 돕는다. 그 인디오들 위에 군림하는 백인 고용주와 지주의 모습은, 16세기 스페인이 멕시코를 침략한 이후에 지속되었던 백인과 인디오 간의 계급 차이가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고용의 형태로 유지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백인들이 즐기는 늪지대의 사격 놀이와 호세네 저택에 가득한 동물 박제 등은 수백 년 전 멕시코 전역을 총성과 비명으로 물들였던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한 멕시코 수탈과 착취의 아픈 역사를 은유하고 있다.

클레오의 임신과 남자친구와의 파국, 고용주 소피아의 이혼 등으로 이어지는 개인사적 이야기는 멕시코 역사의 중요한 격변기와 진폭을 같이한다. 할리우드가 아닌 자신의 사적 기억이 잔재하는 멕시코의 로마라는 공간에서, 철저하게 개인 중심의 이야기로 제작된 영화가 감독의 그 어떤 작품보다 정치적인 함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는 1971년 멕시코에서 있었던성체 축일 대학살의 현장이 나온다. 체 게바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우익무장단체인 로스 알코네스(Los Halcones)가 시민 120명을 살해한 참극이다. 이 역시 클레오의 눈으로 그려지는데, 미국의 지원 아래 창설되고 훈련받은 로스 알코네스가 민주화운동에 나선 시위대를 무참하게 짓밟은, 멕시코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조명하는 셈이다.

그러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로마>를 통해 시대와 공간, 그리고 인종과 문화를 뛰어넘어 인간의 보편적 삶을 이야기한다. 등장인물들은 각자, 인간이면 누구나 삶의 곳곳에서 만나는 희로애락과 자신에게 닥친 환란을 극복해 가는데, 이를 다양한 은유와 상징들을 활용해 잘 표현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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