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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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은 말한다
  • 역사칼럼
  • 승인 2023.12.26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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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도에 일부가 서울에 환도를 해서,국회가 일부 서울로 간다,만다 할 때입니다. 신중목 씨가 열심히 공부하고, 내가 찾아올 때까지 거창사건에 관여하지 말라. 네가 우선 살아야 더 큰 일을 한다하면서 그때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 즈음 되어서 난데없이 방비서가 또 찾아와서 서울에 와서 공부를 하라는 얘기를 한 겁니다. 그래서 그때 제가 고학이어도 대학을 가려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때 박순유 형이 편지가 왔어요. 박순유 형이 논산훈련소 교관으로 있다고 해서 찾아가 봤습니다. 결론적으로 야간대학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신종목 씨 하고 얘기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고등학교 교장이 와서 이름을 이상덕으로 바꾸라고 하는 겁니다.

 

이대로 참고만 있을 수 없다

함차산이라고 거창경찰서 청년단장이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신중목 씨를 받들고 있던 실세입니다. “거창사건을 신중목 씨가 보고하는 것처럼 하는데, 이철수 씨가 어차피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라는 겁니다. “제가 여기 이철수로서는 세상을 살지 못하니까 이름을 지어주세요하니까 내일 다시 오너라.” 사촌형 이름이 복덕이니까 그 아래로 이상덕으로 하나 만들라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건국대 입학원서를 준비하고 있는데, 신중목 씨가 와서 지방으로 내려가자고 하는 겁니다. 우봉순이가 사찰계주임하다가 그만두고 국회의원하려고 나왔다는 겁니다. 이상식 의원이 국회의원하고 그랬는데, 이 사람이 나를 만나더니, 자 돌림인데..., 그래서 신중목 씨 선거운동하고 그래서 정치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결과적으로 야간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선거판에 들어간 거예요. 지금 말하면 수행비서입니다.들어가니까 56년도인가 신도성 씨, 신중목 씨, 한 집안끼리 나온 겁니다. (선거를) 했는데, 낙선한 겁니다. (그러다가 신중목 씨가) 3대 국회의원하기 전에 농림부장관으로 임명 받았어요. 신종윤이라고 총리 비서실에 있던 분이 보더니 신중목 씨 거창사건으로 농림부 장관을 했는데,아직도 붙어 있냐고 한 겁니다. 여기서 신중목 씨하고 갈라집니다. 58년에 4대국회 때인데 난데없이 선배가 찾아와서, “가만히 주저앉을 수 없다. 박순유가 육군대위가 되어 있는데,행정학교 교관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문홍주 씨가 중앙정보부 통신과에 있고...,”

김동영,최형우가 4.19 나기 전에 밤새도록 얘기해서 결론이 거창사건 진상규명하라는 데모를 한번 하자고 해서, 김동영이 안을 내고 해서, 본부를 신촌에 만들어 놓고 준비를 했을 때입니다.그런데 신중목씨가 갑자기 찾아와서 하는 얘기가 농협중앙회장을 하겠다는 얘기입니다.

결론은 이 군이 나를 좀 도와라,그럼 내가 생활을 보장시켜줄게.” 그래서 농협중앙회장 선거를 했는데 52%로 이겼어요.

안방에서 (신중목 씨하고) 같이 잠을 자면서 (농협중앙회장 선거를 도와달라고)나를 설득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농협하고 농업은행하고 합치는 게 어떠냐, 가닥을 잡아서 보고를 하라는 것이 첫 과제였습니다.그때 농림부국장을 찾아가서 농업은행 자료를 받아서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김동영이하고 오더니 빨리 도망가자고 하는 거예요.<동아일보>에 기사가 났는데, 4.19 나기 직전인데, ‘관계자 처단하라’ 2주일을 동안 데모를 했습니다.

 

거창사건은 4.19 혁명의 기폭제

내가 그때 보안대에 끌려갔어요. 들어가니까 거창사건 빨갱이들이 어느 세상인데 다시 나오는냐?” 그때 부대 대장인데 직접 조사를 하는데, “나는 바로 죽어도 좋소하니까,도저히 안되니까,마구 조지는 겁니다. 그때 내가 운동을 좀 했는데,마구 때리는 척했는데,(때리는 척 하는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인 겁니다. 이튿날 내가 나왔습니다. 그게 4.19 나기 10일 전쯤입니다. 대대적으로 데모한 날짜가 10일전쯤 될 겁니다. 거창사건이 4.19의 촉발제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4.19 나기 3일 전인가 덕수궁 앞에서 데모를 했습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유인물에는 거창사건 규명하라그 대목이 들어간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김동영 씨는 동국대학교 2학년인가 그랬을 겁니다. 청운다방이라는 다방이 있었는데, 거기서 데모할 것을 모의하고, 신촌 하숙집에서 (유인물을) 인쇄했어요. 그때(저도) 있었는데 몽땅 뺏기는 바람에 집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요. 지적하고 싶은 것은 3.15 부정선거도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독재정권에 치명적인 것이 거창사건이었습니다. 독재정권을 부르짖는데, 최초의 상대가 거창사건이었다... 그 당시 시골에서도 신성모하고 그 일당들이 왜 파면 당했나,경찰이나 관계 기관에서 그 이야기만 하면 쑥 들어갑니다. 그 거창사건나고 나서 11년 동안... 동생이 부르던 한 맺힌 노래가 있습니다.

1년 동안 농사짓는 과정에서,한번 밥이 늦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점심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노래가 들려요. ‘높고 높은 가막산 꼭대기에 외홀로 소나무야 날과 같이 외홀로 서있구나 바람이 오나 눈이 오나 피할 수 없구나이것만 내가 기억을 하고 있어요. 이건 여동생이 지은 노래입니다. 어디 노랫가락에 붙여서 지은 거예요. 그 노래를 듣고 깨고 내가 배가 고픈데다가 그 노래를 들으니까 화가 났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걔 뺨을 때렸어요. “왜 그런 걸 생각하느냐?” 결국 그날 제가 점심을 안 먹었어요. 지금도 부모 잃은 슬픔 못지않게(그때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거창사건 진실 규명 위해 김종원 찾아가

4·19하고 5·16 사이에 김종원을 만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4·19나고 나서 얼마 있다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고향 선후배들 몇 명이 유족 관계된 사람들을 모아서 박영보도 이렇게 해서 죽였지 않느냐, 김종원이 더 나쁘지 않느냐.” 그래서 잡으러 가자해서 나를 위시해서 곽후섭 씨하고, 박덕순 씨하고 대여섯 명이 갔습니다. 김종원이 집이 혜화동에 있었습니다.어떻게해서 야구방망이를 가져갔어요.내가 가져간 것은 아닌데,사실 나는 망치를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아침9시쯤 해서 김종원 씨 집 정문을 덮쳤습니다. 그래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니까 이미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데,납작하게 엎드려서 거창 희생자들이 찾아올 줄 알았습니다.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사실 제가 죽이진 않았지만 그것을 감싸준 제가 책임이 있습니다.” 이때 때리려고 하는데 누가 막았어요. 그래서 일순간을 넘어가고,그 사람은 퉁퉁 부어 있는 얼굴이었는데,(김종원이) 엎드려가지고, “내가 거창양민학살을 직접적으로 지휘해서 한 것은 아니고 그것을 대내적으로 은폐하기 위해서 내가 동원하고 이렇게 되었으니 죄가 학살자들에 못지않습니다.”그래요. 그래서 30분 동안 얘기를 했는데,나중에 들은 얘기인데,식구가 하나도 없어요. 밥 해주는 아주머니 하나만 있어요. 그때 4·19 직후에 자유당 정부가 마지막 의회를 개화하는 과정에서나, 김동영,김진석 등 여섯 사람이 청와대 앞으로 찾아가서, “거창사건진상을 올바르게 해주십시오.국회가 해산이 되니까 마지막으로 좋은 일을 해 주십시오.”하고 조사단을 구성해달라고 박상길 의원에게 요구했더니, 아침밥을 먹으면서 (그렇게)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창사건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민주당으로 넘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유당 국회에서 구성된 겁니다. 그때 박상길 의원, 조종호 의원 등이 발의해서 조사단이 구성되었는데, 박상길 의원이 자기 지역구인 함양, 산청 등도 같이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창사건 진상조사단, 함양 산청사건 진상조사단으로 나눠서 조사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박상길 의원하고 저하고 굉장히 다투었습니다. 그때 거창사건만 진상조사를 다시 했으면 지금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것이 함양 산청 민간인 학살사건이 최초로 조사 된 것입니다. 거창사건 진상조사단이 현지에 가서 나보고 증언하라고 했는데, 저는 끝끝내 안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창사건은 진상조사를 다시 할 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 두고 갔고, 함양 산청은 새로 한 것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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