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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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은 말한다
  • 역사칼럼
  • 승인 2024.01.0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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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수 "사건 진상이 알려지기까지의 숨은 이야기들" (8)
신성균 "비석을 뿌수고 묘를 파라" (1)

(지난 호에 이어···)

부모가 죽었는데, 쓸데없는 짓 그만 하라고?

  10개월만인가 정권이 넘어갔어요. 군사혁명 나고 나서 고초를 겪는 과정에서 유족들은 거창사건 입도 벙긋 못했어요. 군사혁명 나고 나서 반국가단체로 몰렸는데, 저는 간 크게도 거창사건 때 헌병사령관 최경록 씨를 찾아갔어요. 사실을 예기했더니, “내가 강영훈 장군을 찾아가거나 해서 확인할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최경록 씨가 거창사건 때 몇 살 먹었냐.”고 그럽니다. 최경록 씨가 너 글 잘 쓰지?” 하면서, 김영무 씨가 투서한 것을 저로 착각한 겁니다. 제가 말을 못했습니다. “그 당시에 나를 만났어야 되는데, 재판정에 관계자를 세우려고 노력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출석하지 않는 기형적인 재판을 했노라.” 그럽니다. “그러나 이종찬 장군한테 두 번이나 얘기했고, 강영훈 장군,이용문 장군이 검찰관이었는데,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나름대로 했다.” 그 투서를 접하고 이튿날 바로 장교 세 명을 현지에 파견해서 확인을 했다는 얘기를 최경록 장군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강영훈씨를 찾아가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라.” 그런 얘기를 제가 들었습니다.

 

결국 누이는 스스로 한 많은 생을 마감

  그리고 한동석이라는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해서 강릉을 갔더니 강릉시장을 그만 뒀다는 겁니다. 제가 안양에 산다는 것까지는 들었는데, 애들 명의로 집을 샀다 하면서 이사를 많이 다닌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박영보 씨가 죽은 걸 알고 피해 다닌 거예요. 제가 대문을 넘어 들어가 마침 그때 새벽에 (한동석을) 만났는데, 도망을 가서 만나지 못했어요. 나중에 소문은 이철수가 죽이러 갔는데 가까스로 도망을 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죽이려는 것도 아니고’...(편지를 썼더니)전화가 왔어요. ‘지금은 때가 아니니 나를 찾지 말고, 언젠가는 내가 이철수 씨를 만나겠다는 겁니다. 결국은 제가 만나지 못했는데 지금은 죽었어요. 제가 일도 하고 하면서 거창사건하고 조금씩 멀어져 갔고, 거창 유족들하고도 좀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신원지서가 습격된 사건이 있었어요. 그때 공식보고는 인민군 1개 사단이 와서 습격된 사건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5~6명이 와서 습격하고 2~3명이 죽었는데, 이를 30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허위보고가 되고, 그 허위보고가 계속 올라가는 겁니다. 거창사건 당시에 전후해서 군인이나 경찰이나 신원에서 공비 하나 대치한 적도 없고,사살한 적도 전혀 없습니다. 실제로 없습니다. 그런데 왜 계엄령을 선포하고 학살을 하고 했느냐. 최덕신 사령관이 앉아서 보고를 받을 적에 보고가 잘못 되어서 위에서 족치니까 한동석이가 돌아와서 한 겁니다. 제가 제일 억울한 거는 대한민국 군인이 민간인을 분별할 줄 모르는 군인이었느냐? 그런 명령을 받았다 할지라도 노소고하 막론하고 왜 이유 없이 다 죽이느냐?’

 거창사건 유족들에게만 유리하게 해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권력이 이를 했다면 이에 상응하는 법적 조치를 취해주는 것이 타당한 것인데, 왜 통비분자가 아닌데 통비분자라고 하느냐?

 

- 누이동생은 증언 기록이 없습니까?

누이동생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아마 28세 때 죽었을 겁니다. 그때 그 노래를 나만 들은 것이 아니고 동네 아주머니들도 들었습니다. - 이철수 씨 증언 -

 

                      신성균씨
                      신성균씨

비석을 뿌수고 묘를 파라 신성균

저는 비곡에 사는 신성균이요. 29년생입니다. , 그 전 얘기는 앞의 사람이 다 했고, 내가 지켜 본 것은 5·16 신미년 일입니다. 신미년 때 군이 그랬는가, 경찰이 그랬는가 유족을 소집했어요.유족회에서 소집한 게 아니고..., 누군가 해서 쫓아와 들어오니 경찰이 와가지고 마 논을 파라’,‘비석을 뿌솨라’..., 우물쭈물하고서 있는데, 누가 하나 쫓아오더니 거기다(비석에다)디립다대고’‘뿌수라이기라. 내가 뭐 손가락으로 뿌솨? 돌을 부수려면 기계가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연장을 갖고 와야지. 그게 이제 핑계라. 그래 어디서 해가왔는지(구해왔는지) 연장을 갖다 주더라고, 주는데 차마 이걸..., 그래서 거짓으로 글자를 쪼아대는데, 대뜸 확 잡아서 치더라고요. 그렇다보니께 또 하나 더 끌고 왔어. 두 사람이 쪼았어. 앞에 큰 글자 몇 개 제가 뿌솼습니다. 그때는 유족들이 많았어요. 젊은 사람도 있고, 나이 많은 사람도 있고, 비를 치우니 자빠지거든요. 그 옆에 파다 묻었어요. 비는 빼서 신원에 세워 놓은 게 그게 그대롭니다. 그것도 세월이 간 다음에...

 

내 가족 찾아내면 유골 가져갈게

-그러니까 5·16 군사쿠데타 나고 난 뒤에 군인들이 와서 유족들을 합동묘소 앞에 모이라고 했다는 거죠?

  네, 그렇지요. 군인도 있었고, 경찰도 있었고... 유족들이 많이 왔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비석을 뿌수라고 했어요. 옆에 있으니까 뿌수라 카는데 손가락으로 뿌술까’, 이랬어요. 오전에 기계를 가져오더니 기계도 뿌수라 그러드만요. 거짓으로 글자를 쪼니께 뒤통수를 치더라고요. 그날 뒤통수를 세 번이나 얻어맞았다고요. 그래 앞글자는 제가 뿌솼어요. 그리고 묘를 파라 캐서 결국은 팠지요.

-그 자리에서 묘를 파라 그랬어요?

  아니, 그 자리에서 우리는 묘 파라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묘를 그날 안 파고 이틀인가 사흘인가 있다가 팠을 기야. 그때 그런 소리를 했다더만, “시신을 자기 지역 공동묘지에 갖다 묻어라.” 하니까 (유족들이) “그럼,내 가족 찾아내라, 그럼 가져갈게.” 이런 소리를 했다더만.

 

-그리고 그 뼈를 강제로 나눴어요?

 뼈는 무슨 뼈, 흙인데, 갖다 버린 사람도 있고... 그라고 우리가 묘를 쓸적에는 땅을 깊이 파고 묻었는데, 시방(군인들이 파라고 해서)팔 때는 우에 따까리만 떼고 만 거예요. 그러니까 묘를 완전히 판 게 아니고 흉내만 냈다, 이 말이지요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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