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ROMA)의 준순이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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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ROMA)의 준순이 ③
  • 박혜원(소설가)
  • 승인 2024.01.19 23: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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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로마 포스터 (사진출처 : 네이버)
                                 ▲ 영화 <로마> 포스터 (사진출처 : 네이버)

(*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준순이는,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일과 복잡한 감정들을 무엇을 통해 인식하고 극복해 갔을까? 삶의 도처에서 만나는 고단한 문제들을 소리를 넘어서는 또 다른 감각으로 견뎌냈던 것일까? 어린 내가 바라보았던 준순이는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오히려 침묵의 깊이로 이겨냈던 게 아니었나 싶을 만큼 자기 앞에 주어진 일상을 잘 감당해 냈던 것 같다.

 

  영화 <로마>에서 소피아 부부가 이혼하고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바닷가 여행을 간다. 클레오도 따라간다. 수영을 하던 중에 파코와 소피가 바닷물에 빠지는데, 그 순간 헤엄도 칠 줄 모르는 클레오가 거친 파도로 뛰어들어 아이들을 구한다. 파도처럼 할퀴고 간 절망적인 일 속에서도 남은 가족은 서로 껴안으며 서로에게 울타리가 되어준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우린 다 혼자야!”라면서 냉정하기만 했던 고용주 소피아가, “많은 게 변하겠지만 우린 모든 걸 다 함께 할거야라고 클레오를 위로한다.

  고통 속에서도 클레오와 소피아는 중심을 잡고 가족을 이끌어 간다. 남편의 외도로 홀로 남겨진 소피아와 애인에게 버림받은 클레오는 남자들의 빈자리에서, 무책임하고 충동적인 남성성에 대비되는 여성성과 모성의 따스함과 강인함으로 가족을 지키는 입장을 공유하며 교감한다. 절망 속에서도 안간힘을 다해 자신의 삶과, 나아가 주변 사람들의 삶까지 싸안으며 난관을 극복해내는 클레오와 소피아의 사랑은 기적과도 같다. 이 기적은 영화 속에서 소베크 교수가 말하던 기적으로, 온 몸의 에너지를 집중해야하는, 시시한듯하면서도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것인데, 이 기적이 허세와 모순덩어리의 남자가 아닌, 여성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클레오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는 은유적 인물이다. 정치적 혼란과 불안의 시간을 겪어내던 멕시코의 상징적인 존재로, 본래는 멕시코 땅의 주인이지만 인종 차별의 불이익을 감내해야 했던 원주민이면서 사회적 경제적 하위 계층이며 힘없는 약자이다삶의 곳곳에서 삐걱대고 부딪히며 깨지는 클레오의 모습은 1970년대 멕시코의 성체 축일 대학살현장과 맞물리며 시대적 비극과 맞닿아 있다.

  70년대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클레오가 있었다. 당시 가난한 시골 출신의 여자들은 가족을 위해 도시로 나가 공장에서 일하거나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거나 잘못 빠지면 술집에서 호스티스가 되는 일이 많았다. 사회는 극심하게 양극화되고 곳곳에서 계급 간의 갈등이 일어났으며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민주시민들은 피를 흘리며 죽었다. 남의 집에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사회적 격변과는 무관한 것 같아 보이는 그 시절의 클레오나 준순이는 사회적 타자인 여성으로서, 그야말로 사회적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견디고 극복해내는 대표적인 인물인 셈이다.

  또한 <로마>는 흑백 영화인데, 암울했던 1970년대를 기억하기에는 흑백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시대가 흑백논리가 횡행했던 시대였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 까? 뿐만 아니라 흑백이기 때문에 색채 대신 우리 삶을 감싸는 온갖 소리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건 아닐까?

 

  나는 한때 갓 태어난 손주를 위해 제주도에 머문 적이 있다. 안 그래도 생활이라는 게 자잘하게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아기까지 있으니 함께할 일손이 참으로 아쉬웠다. 더구나 고향도 아니고 모든 관계가 돈이나 계약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마음까지 팍팍해질 때가 많았다. 문득문득 삶의 빈틈과도 같은, 여유로운 사람이 그리웠다. 고향에 돌아온 지금도 손주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 여전히 도와주는 손길이 필요할 때가 많다소리도 안 들리고 말도 제대로 못 했지만, 그 누구보다 영민하게 온 가족의 일상사에 함께 하고 우리를 돌봐주던 준순이생각이 많이 난다

  그리고 온 동네 가득 사람들이 넘쳐나,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함께 일을 나누었던 옛 정경이 떠오른다. 아이들은 이웃의 사랑과 관심 속에서 잘도 자라고, 와글와글 갖가지 사람 사는 소리들로 넘쳐나던 어린 시절의 골목길이 그리워진다. 점점 비정해지는 <로마>의 거리에 기적 같은 사랑이 곳곳에서 일어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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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훈 2024-01-22 19:48:23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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