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은 말한다 - 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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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은 말한다 - 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 #37
  • 한들신문
  • 승인 2024.01.22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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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균 "비석을 뿌수고 묘를 파라" (2)
임기섭 "이제 남은 소원은 명예회복, 그거 하나뿐이라요" (1)

서울대 법대-한인섭 교수

 

(지난 호에 이어)

항의의 표시로 비석을 땅 위에 걸쳐놔

ㆍ그리고 그 비석을 누가 땅에 파묻었어요?

  아이고, 뭐 유족들이 파묻었지요. 군인들이 그러라고 시켰어요. 비석을 뿌순 그날 파가(땅을 파서) 묻었지요. 그리고 27년 후에 88년도에 다시 올려놓았습니다. 위령제 하기 전에, 우리가 89년도부터 위령제를 지내기 시작했거든. 근데 파내고 세우지 않고 땅 위에 걸쳐만 놨어. 89년도인가 90년도에 위령제 지낼 때, “느그 손으로 파묻었으니까 느그 손으로 세워라.” 이래 된 기야. 그래가지고 박찬종 씨(국회의원) 와서 세우자그래가지고 우리 여럿이 붙어가지고 고만큼 세워 놓은 기라. 그러니까 무덤 앞에는 무거우니까 못올리고. 땅에 요 정도 넘어져 있는 걸 박찬종이가 와가지고 지금 그 상황으로 세워 논 기라.

ㆍ할아버님은 거창사건 날 때 어디 계셨습니까?

  나요? 그때 군인 생활했습니다. 내가 507월에 군에 들어갔거든요. 그래서 525월에 제대를 했어요. 521월까지 대구 육군병원으로 돌았습니다. 부상을 입어가지고 월미야전병원을 통해가지고 대구피난구 제 1병원에 있었거든요. 거창읍에 우리 이모 집이 있어요. 이모 집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 집에 편지를 보내니께 편지가 안 들어가요. 그래 거창 이모 집으로 편지를 보내니께 이모가 어머니 데리고 면회를 왔더라고, 병원에서 그 소문을 들었어요.

ㆍ그때 그 가족 중에 돌아가신 분이 있습니까?

  있지요. 동생 둘이 죽었습니다. 우리 여동생이 둘이거든, 남동생 하나해서 모두 서인데(셋인데), 군인 가족 나오라 하니까 요기(동생들이) 쪼께 나잖아(작잖아).그래 뭣도 모르고 나오는데 문을 닫어버리더라캐. 그라니께 안에 있는 동생은 못 나온 기라. 그때 죽은 동생이 열여덟살 먹은 남동생하고 여섯 살 먹은 여동생이에요. 그래 나오니께네 학교 정문에서 누가 지켜 섰더랍니다서가지고 빨리 양지리로 가라고 하던가시방 말하면 초등학교지, 그 학교로 데리고 갔더래요고거는 집에 어머니한테 들은 소리라.

ㆍ그 박산 골짜기 가 보셨어요?

  제대하고 나서 53년도인가 가봤지요.

                                                                     - 신성균 씨 증언 -

 

 
▲ 임 기 섭 (가운데)
                                                                   ▲ 임 기 섭 (가운데)

< 이제 남은 소원은 명예회복, 그거 하나뿐이라요. >

  저는 임기섭이라고 하고 지금 칠십 너()이요. 당시 6·25 사변 나고 나서 산에 빨치산이 안많았습니까? 지리산이니, 저 대운산이니 빨치산이 많았거든. 그 당시 지리산, 대운산(군인들이) 토벌하러 가는 길목이었던 모양이에요.

그 당시 군인들이 왔다갔다 몇 번 했어요. (군인들이) 섣달그믐날 인자 올라갔거든요. 인자 올라가더니만 정월 초에 군인이 내려오는 기라. 군인이 내려오는데, 오디만(오더니만) 군인이 마을에 들어선께 거창 농고가 집결지라고 하더라고그래 군인이 청연골 들어가다 청연골 사람을 무조건 총살시켜버렸다 카는 기라. 무조건···. 연락이 부모들한테 왔던 모양이요.

  그때 부모들이 집에 같이 있었응께. 그래 어무이, 아버지가 네 동생을 데꼬(데리고) 느그들 누나집에 가라.” 우리 증조할아버지 제사가 정월 초닷새날이요. “초닷새날 증조할배 제사 지내고 우리는 갈게, 느는(너는) 아들(동생들) 데리고 가라카는데, 동생들은 안갈라 카는 기라. 내가 같이 가자는데, 동생들이 안 갈라 캐. 어무이, 아부지하고 같이 간다고 안 갈라 캐. 그래서 나는 아침에 날 새던 길로, 누나 집이 구사리라 카는 데 있는데, 그리 갔거든요.

살려달라며 군인을 안으니까 보내줘

  난 구사리 외갓집에 들어가 있었는데, 군인이 싹 올라가 가지고 와룡, 대현, 중유골에(사람들을) 모았던 모양이지요. 그래 인자 앞에 몰아 내려간 사람은 학교 교실에 가두고, 또 뒤에 내려 오는 사람은 오다가 날이 저문께 탄량골에서 죽여삐린 기라요. 그런께 청연골하고, 탄량골하고, 학교 가둔 사람하고 사흘간 죽인 기라요. 거 죽여삐리고(군인들은) 내려가 버리고···. 이건 내가 안 보고 들은 이야기야요.

  그래 인자 학교에 가둬놓고 하루 종일 밥 굶겨 가지고, 이튿날 아침에 우리 초등학교 앞에서 박면장하고 군인하고 오디만(오더니만) “군인 가족, 경찰 가족 불러내라카는 기라. 그래 불러 낸께 면장이 군인 가족이 뭐 이렇게 많아? 경찰 가족이 이렇게 많아?” 거 몇 명 나오니께 문을 닫아버렸다 카는 기라. 그래가지고 인자 그 사람들은(경찰 가족, 군인 가족들은) 윤현국민학교에 모이라 카는데, 아래로 내려가다가 친적 있는 사람은 친척한테가 버리고, 친척 없는 사람은 굳이 갈 데가 없응께 윤현국민학교에 모였거든.

  면장이 들어오더니만 뭐라 카는가 하면, “군인가족, 경찰가족 뭐 이렇게 많아?” 그런 소리를 하더라는 기라. 그래 인자 누나 집에 있응께, 그때가 새벽쯤은 됐을 기요. 그래 있응께, 우리 외가에서 문홍준 그 양반이 피가 벌거이(벌겋게) 해가지고 들어온 기라. “거 옷이 와 그러냐?” 한께, “사람 다 죽었다그러는데···. 그래서 와 옷이 그래 뻘겋소?” 그러니께 내가 와 옷이 이런가 하면, (군인들이) 골짜기에 사람 모아 넣고, 하나(나를) 빼디만(빼더니만) 골짜기에 넣은 사람을 총살해가지고 죽여서 옆으로 나간 사람 주워 넣으라하는 기라. 그래 인자 밖으로 나온 사람이 없은께 나무 베어 오라카는 기라. 그러더만 나무를 이리 흩어놓고 난께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리는 기라.” 불 지르고, 총으로 쏘니께 (사람들이) 안꼼지락거립니까? 그래가지고 기어 나오는 사람이 있응께 그거 잡아넣으라하는 기라. 그래서 옷에 피가 벌거이(벌겋게) 묻어가지고···.

  그러니까 나온 사람 없응께 그 사람을 사람 죽인 언덕에 세우디만 총을 쏠라 카는 기라. 거서 둘이 살았거든요. 그래 그 사람 둘은 어찌 살았냐면, 총을 쏠려고 하니까 살려달라고 군인을 안았던 기라. 그래가지고 살아 나왔다고 그런 말을 해요. 그래서 인자 그 아랫동네 있는 사람들은 안 죽은 사람들은 차황으로, 산청으로 사방으로 다 피난을 가버려. 그때 있는 사람은 다 죽은 기라. 그래 군인들이 인자 사람 죽이고 나서 계엄령을 내렸어요.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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