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머거리 집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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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머거리 집 ①
  • 박혜원(소설가)
  • 승인 2024.02.05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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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야 옷을 벗은 마야, 옷을 입은 마야- 1802년 경 (그림 출처 : 구글 이미지)
                        ▲ 고야 「옷을 벗은 마야」, 「옷을 입은 마야」 - 1802년 경 (그림 출처 : 구글 이미지)

  어릴 때 아버지의 방에서 미술전집을 꺼내 책장을 넘기며 놀곤 했는데, 그 책들은 나로 하여금 예술세계로 발을 내딛게 한 첫 관문이었다. 책 속의 사진들은 어린 나에게 사물에 대한 눈을 새롭게 뜨게 했고, 예술이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도 아프게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했던 것 같다.

  일본어판 옛날 책이라 자세한 내용도 알 수 없고 지금처럼 색채가 선명하거나 실감나는 질감도 지니지 못했지만, 그 당시에는 유아기적 취향으로 작품에 접근했던 것 같다.

  조각가들은 대리석에 영혼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관능을 담았고, 소실점을 향한 가로수 그림은 나를 아득한 그리움의 세계로 안내했으며 도도하면서도 앙증스런 황녀를 담은 궁정화는 환상적인 꿈을 꾸게 만들었다. 허나 때로는 파격적인 소재와 음산한 색채, 강렬한 선으로 처절한 고통을 담은 작품들도 있어, 소소한 기쁨과 평범한 일상을 뛰어넘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느끼게 했다.

  그때는 17세기 스페인의 궁정화가(宮廷畵家)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좋아했는데, 그의 그림은 나를 행복한 동화세계로 이끌어갔다. 특히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초상화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 화려함이 제국의 영광이 급속하게 사라지는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퇴영과 광기를 드러내는 스페인 왕후 귀족들의 허식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궁정화(宮廷畵)가 겉으로는 왕족의 영화로움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당시 궁정 사회의 인습과 무기력, 허명(虛名)과 퇴폐 또한 함께 담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 주변의 인물들, 특히 하녀나 광대, 그리고 공주 곁에 있던 개 등은 관심 밖이었는데, 그들은 쇠망해 가는 스페인 왕족의 위안물로서 장난감 취급당하는 존재들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겨서 그 다음 장에 나타난 그림들은 앞의 그림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짙은 선과 단순화된 검은 색채, 화폭에 담긴 사람들의 어둡고 처참하면서도 비열한 표정맨 처음 그 그림을 본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가슴이 떨리고 오랫동안 그 잔상이 마음에 남아있어 힘들었다. 왠지 그 그림을 다시 보는 게 두려웠다. 책을 덮은 후에도 그 이미지들은 너무나도 또렷하게 남아있어, 그림 속의 사람들이 내 마음의 움직임과 행동거지를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그 후로도 어둡고 삿된 생각에 사로잡힐 때마다그 그림이 떠오르곤 했다.

  그 그림을 그린 작가는 스페인의 고야였다.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옷을 벗은 마야옷을 입은 마야로 유명하다. 그 시대에는 어떤 비유나 신화적 연관성 없이는 나체화를 그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옷을 벗은 마야>잠자는 비너스같은 고전적 주제에서 벗어나, 현실 속의 여성을 위험하고 관능적인 모습으로, 강한 리얼리티로 표현했다. 이 그림은 신성 모독 논란을 일으켰고 고야는 종교재판을 받기도 했다그림에 옷을 입히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옷을 입은 마야>를 새로 그렸다. 같은 모델을 대상으로 나체와 옷을 입은 모습, 두 가지의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세계 회화 상 유일하다고 한다.

  고야는 1746년 펜테토도스라는 시골에서 태어나 1780년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786년에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전속화가가 되었으며 1789년에는 카를로스 4세의 수석 궁정화가가 되었다. 그는 출세의 탄탄가도를 달렸고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는 자신이 받는 연봉을 자랑삼아 밝히기도 했다.

  고야는 왕족의 초상화와 주요 성당의 벽화 작업을 하면서 태피스트리 밑그림과 카툰도 계속 그려야 했다. 과로에 시달리던 그는 1793년에 휴가를 얻어 여행을 떠났는데 여행 도중에 중병(콜레라라고도 하고 수막염이라고도 한다.)에 걸렸다. 카디스(Cadiz)의 후원자 집에서 요양해 회복은 되었으나 청력을 상실했다. 화가로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리던 인생 최고의 절정기에 청력을 잃은 것이다. 인생의 전기(轉期)를 맞은 고야는그 이후부터 밝고 따뜻한 그림 대신 환상적이면서도 악몽을 표현하는 것 같은 어두운 그림들을 남겼다. 무거운 주제와 침울한 색조를 담은 작품으로 변한 것이다. 이 시기의 고야는 환락의 덧없음과 공포, 폭력의 악마성, 무의식적인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대한 탐구심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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