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은 말한다 - 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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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은 말한다 - 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 #39
  • 역사칼럼
  • 승인 2024.02.23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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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섭 "이제 남은 소원은 명예회복, 그거 하나뿐이라요" (3)

서울대 법대-한인섭 교수

(지난 호에 이어)

묘 파내고 사람 잡아넣고

  그 있다가 군사혁명이 안왔습니까? 군사혁명이 오고 나서 유족간부들을 용공단체로 몰아가지고 유족회 간부를 아홉명인가, 여덟명인가 잡아다 가둬놓고···. 그래 인자 그라고 지내다가 한달 넘고 나서 경찰수사계에서 와 가지고 지서 숙직실로 모이라카는 기라. 그래 지서 숙직실로 가니까 지금 묘를 파야 된다카는 기라. ‘묘를 파라칸께 어떤 사람은 몬 판다카고···. “파려면 자기네 묘나 파라 카지 못 판다카는기라. 그러니께 그 묘를 파야 잡아 가둔 사람이 나온다카는기라. (유족들이) 분해가지고, “가둬 놓으면 평생 가둬 놓을 건가?” 그러면서 악으로 못 판다고 그러는 기라.

  그래 인자 이튿날 아침에 묘 파러 오라카는 기라. 경찰이 와 가지고(묘지 앞에 있는) (비 석)를 자빠뜨리고, 넘어뜨리고, 글자를 뭉개가지고···. 그래가지고 묘를 파 버리고, 묘를 파 버리고, 묘를 파 버리니까 재가 나오니까 이건 니 몫, 이건 니 몫, 쪽을 내가지고(나눠가지고), 그걸 공동묘지에 가져다 묘를 하라는 기라. 그걸 가지고 가서 공동묘지에 묻은 사람도 있고, 나는 묘를 하지 못해가지고 그냥 묻었어요. 어찌나 분하든지···.

  그래 인자 며칠 있응께 박영보 살해라고 고발이 나서 잡으로 온 기라. 뭐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다 잡아가는 기라. 양심 있는 사람은 잡혀가버린 기라요. 그래 가서 내가 8개월인가만에 나왔어요. 그래 배 검사가 그 사람 죽일 사람이다. 죽일 사람인데 혼자 가서 때리지 와 여럿이 가서 때리노?” 그 카는 기라. “혼자 때리나 여럿이 때리나 죄는 같은데 왜 여럿이 가 때렸나?”

  그래 내가 말하기로 경찰 서장이 와서 말하는 그바람에 그 사람 죽었다고 그러니께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기라. 나는 그러고 인자 있다가 나왔는데, 또 아들이 용공단체에 엮인 사람은 (나보다) 뒤에 나왔어요. 그때 무죄로 나온 사람도 있고, 집행유예로 나온 사람도 있고.

  세월 넘기고 대통령 바뀔 때마다 명예회복할라고 (탄원서를) 집어넣으면 돌아와버리고 돌아와 버리고, 박정희 대통령 때도 집어넣으면 돌아와 버리고 돌아와 버리고···. 그래 참 얄궂게 명예 회복하려고 하고 있는데, 이게 참 명예회복 되겠나, 안되겠는 기라. 명예회복을 하려면 대통령이 해야 명예회복이 되지. .

  내가 제일 억울한 게 부모는 나이가 많으면 죽겠지만 동생들 다 죽어 버린께 나 혼자 3대 독자가 돼 버린 기라. 그게 제일 억울해. 그렇게 내가 욕을 봤습니다. 그래 우리가 데모하고 해가지고 명예회복 해달라고 안하는 깁니까?

 

 우리 신원사람은 살아봐야 산 것도 아니오

· 군인들이 첫째 날, 청연마을서 사람들을 죽이고 둘째 날, 탄량골에서 죽였잖아요. 둘째 날 죽은 사람들은 신원학교로 몰고 가다 죽였어요?

  그랬다 캐요. 나는 그 전에 집에 갔으니까 몬봤거든요. 군인이 동네 사방에서 몰아가지고 내려오니께 뒤에 내려오는 사람, 앞에 오는 사람 안 있습니까? 이래 오니께, 앞에 내려온 사람은 신원국민학교에 들어가고, 뒤에 내려오는 사람은, 왜 죽었냐면, 날이 저무니께 데리고 가다가 거기서(탄량골에서) 죽여버렸다 카더라꼬요.

  거서 살아나온 사람도 있고···. 탄량골에서 군인이 나무 갖다가 흩어놓고 불 질러 버렸거든요.

  불 다 지르고 나서 군인이 가 버렸거든. 가버리니까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살아 나온 사람이 하나 있는 기라. , 박산골에서 그러고 난 뒤 바위 밑에 있다가 살아 나온 사람이 있어요. 그래 두 사람이 살아 나왔는데, 다 죽어버렸어. 그 사람들 거기서 수명이 다 되고, 혼이 나가버렸는지 오래 못 살고 죽어버렸어요.

· 할아버님 가족 중에는 누가 죽었습니까?

  부모님하고 밑에 동생들 서이() 죽었지요.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그날 아침에 우리 부모가 (나한테) 동생들 데리고 가라 칸께 동생들 안 따르고···. 그래 나 혼자 밖에 몬 산 기라.

· 가족들이 죽었다는 걸 언제 알았습니까?

  사람 막 총살해 놓고, 또 불 지르고 기어 나오는 것을 주워 넣고 난 뒤에 총살시키려 하니 살려달라고 해서 산 사람이 피가 벌거이(벌겋게) 해가지고 나 있는 내 누이 집에 왔어요. 그 사람이 인자 사람 다 죽었다한 기라. 그래 아는 기라. 그 사람이 문홍준이라고 여기 대현리 사람인데, 그 사람도 세상 떠났어요.

· 가족들의 죽음을 확인하러 간 게 언제였나요?

  그래 총살시켜 놓고, 동네 불 싹 다 질러 놓고 계엄령을 내렸어요. 군이 계엄령 내려 버리니까 살아남은 사람도 올라갈 수 없는 기라. 그러고 나서 한 보름 뒤에 가서 인자 남은 곡식이나 뭐 짐승들이나 튀어나온 게 있는가 가 보고 가지고 오라고 보내서 그래 올라왔어요. 그래 올라와 가지고 자형하고 나하고 둘이서 시신이나 찾을랑가 싶어서 거(거기) 갔던 게 아닙니까? 그래가 보니까 까마귀 떼가 확 날아가는데 참···.

· 아까 말씀하신 석물이 지금 박산골에 있는 위령비가 맞나요?

  예. 시방은 돌 공장에서 저그가 해서(자기들이 만들어서) 차로 실어다주지만 그 당시엔 돌 공장이 없어서 돌쟁이 데려다가 만들어놓고 그래 있다가 4·19가 난 기라요. 그래 4·19가 난 뒤에 돌을 옮겼어요.

· 이은상 씨가 글 쓴게 언제죠?

  4·19 전에 도비로 석물을 그래 한 기라요.

· 5·16이 난 뒤에 유족회가 용공단체로 몰려서 여러 분들이 잡혀가셨잖아요?

  당시 유족회 간부들, 회장하고 총무하고, 간부들 여덟인가 아홉인가 고래 잡혀가고, 그 뒤에한 달 넘어가는데, 박영보 살인사건 고발이 들어와가지고 잡혀 들어갔어요. 그때도 잡혀간 사람은 잡혀가고, 안 잡혀간 사람도 있고···. 그래 자꾸 잡아들이고 하니까 유족들이 나는 유족 아니라고 도망가고···. 그 당시에 그란 기라요.

  나는 그때 잡혀가서 경찰서에 한 달 있었을 겁니다. 거서(경찰서에서) 조사 한 번 받고, 또 진주형무소로 갔어요. 진주형무소 가니께 군법으로 가야 된다 카는 기라. 그래 부산에 가서 우리는 (재판을) 받았어.

· 군사 재판을 받으셨습니까?

  형무소에 갇혔어도 조사 같은 것은 군검사, 군판사가 군법에서 처리하지. 내가 군검사한테 신원사건 난 거 이야길 하니까 그럼 혼자 가 때려 죽이지 와 여럿이 가 때려 죽이노? 혼자 때려죽이나 여럿이 죽이나 죄는 똑같이 받는데···.” 그래 내가 박영보를 죽이려고 한 게 아니고 몇가지 물어 보려고 잡아가지고 올라오는데, 경찰 서장이 유족이랑 이야기 하다가 그리 돼 버렸다고, 경찰이 죽였는가, 우리 유족이 죽였는가 모른다꼬···.” 그때 36개월에 2년 집행유예인가 그래 받았지요. 무죄 나온 사람은 무죄 나오고···. ‘나는 안 간다그 카는(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무죄 받고 그렇게 됐어요.

  그래가지고 그 세월 다 가버리고, 나도 이래 죽다 살아나고···. 이게 완전히 해결되는 걸 보고 죽고 싶다 그 말밖에 없어요. 배상이 돼야 말하자면 완전 명예회복이 되는 게 아닙니까? 돈 많이 주든가 적게 주든가, 되는 걸 보고 죽으면 싶은 그 맘 밖에 없어요. 이적까지 우리는 살아봐야 산 것도 아니오. 이 사람한테 고초 받고 저사람한테 고초 받고, 우리 신원사람은 유족 아니라도 신원조회 해가지고 좋은데 못 갔는데요. 신원조회에서 다 떨어져 버리고···. 그게 사람 사는 겁니까? 너무 억울해요.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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