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반을 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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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반을 꾀하다!
  • 귀촌인 정애주
  • 승인 2024.02.23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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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11월의 어느 일요일, 남성 설거지팀 투입 인증샷
                                ▲ 2021년 11월의 어느 일요일, 남성 설거지팀 투입 인증샷

  친정 아버지께서 은퇴하시고는 내내 집에 계셨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셨다가 군인들이 군화발로 교단에 올라 힘을 과시하는 것을 보시고는 군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셨단다. 부모님과 형제들을 위해 힘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셨다. 이후 투철한 애국정신과 근면성실한 어른의 품성은 대한민국의 이사관이라는 공직수행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셨다. 이후 어느 백화점 부사장으로 잠시 출근하시는가 싶었는데 얼마 안가서 퇴사하셨다. 공직 생활자의 고지식한 전장터와 민간 사업장의 수지타산 싸움터는 현저하게 달라서 적응하지 못하셨다.

  집에서의 칩거로 새로운 취미를 찾게 되었고 재능도 더불어 발견하셨다. 식물을 키우는 일이다. 동양란이라는 화분이 방에 빼곡했고 마당의 작은 화단에는 돌 사이사이 이름 몰랐던 식물들이 빼곡했다. 당신의 연륜과 지각을 다해 지극정성으로 그 녀석들을 거두셨다. 덕분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당신 주변에는 화분들이 그득했다.

  문제는…… 당신의 취미생활을 하시는데 시중드는 사람들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배우자였던 어머니는 물론, 오빠, , 가족 모두 주변 식솔들이 당신의 반려식물을 돌보는 일에 스탭으로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번거롭고 짜증나고 어떤 경우에도 당신의 호출을 우선해야만 했다. 정말 그때 그 시절 아버지의 음성은 무소불위 절대지존이었다. 상대적으로 가장 어린 나는 최하위 계층이고 최다 부름을 받은 스탭이었다. 왜 왜 왜 당신이 취미생활하는데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호출자가 또 있었다. 오빠다.

  애주야! 불러서 부리나케 내 하던 일을 내려놓고 뛰어가 보면, 불 꺼! 아니면, 그거좀 가져와라! 등의 잔심부름을 시키는 것이다. 왜 왜 왜 자기 일을 굳이 나를 불러야 하나?! 결혼하니 또 있었다. 밥을 한 자리에서 끝까지 먹지 못했다. 간장은? 고추장은김은? 국 더 있나? 아이고…… 아니, 언제까지 여자야!!! 이 연사, 남존여비를 고발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그 남존여비의 문화를 고스란히 겪어내며 분투하여 용케도 제 역할과제 자리를 잘 가려, ‘남녀의 역할이 다를 뿐 존중 받아야 할 가치는 동등함을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구축, 제법 흐믓한 성과를 누릴 즈음, 이곳 거창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다시 거룩한 싸움의 기시감이 왔다. 마을 회의가 있을 때였다. 어김없이 남자편, 여자편이 나뉜다. 그건 오케이! 장보고 밥하고 설거지는 온통 여자 몫이다. 안다. 이렇게 단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남자 어른들의 몫도 분명히 있다. 거칠고 힘든 일은 나서서 멋지게 훌륭하게 해내신다. 그런데도 묘하게 동등한 남녀의 구별이라기보다 남존여비에 가까운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 기시감의 실체를 이른바 현장 채집한 곳은 교회였다. 매주 출석해서 예배를 드리는 주일에 점심 한 끼를 성도들과 맛나게 먹는 것은 이곳 생활의 큰 기쁨 중에서도 으뜸이다. 손맛들이 좋으셔서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만큼 가성비 짱인 음식들이 매주 즐비하다.

  다시, 문제는…… 밥도 여자들이 하고 뒷설거지도 여자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본인은 조금도 그런 표정도 않으시지만 목사 처의 교인 식사 수발은 여러모로 받아만 먹는 나는 늘 미안하다. 이런 맥락에서 그간 40년 가까이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한 모반을 해본 당사자로서 그간의 심정을 남편과 공유했다.

  쟁쟁거림은 여자들의 해결 방법이라면 훅 질러버림은 남자들의 해결 태도인가 보다.

  어느 날 주일, 예배를 드리고 기쁘고 기쁜 오찬을 하는데 남편이 큰 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음부터 설거지는 남성들이 하면 어떤가? 당신과 낙향한 동료 목사와 함께 한 달에 한번 설거지를 하겠다고 공언하였다. ! 그리고 설마! 그럴 수는 없지! 등등의 표정들이 혼재되었다.

  그리고 모월 모시 주일 오찬 뒤에 신입 설거지 전사들이 주방에 진입했다. 절대로 설거지를 맡길 수 없다는 권사님, 신기하다고 흥분하는 성도들, 아이고 나도 해야 하나 싶어 속으로 걱정 되시는 장로님들그리고 나는 이 모든 광경이 재미나서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이렇게 시작했다. 어딘지 모를 남존여비의 문화가 여전한 이곳에서, 모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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