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어머니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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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어머니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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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2.26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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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탕자의 귀향 (1966, 렘브란트
                                              ▲ 탕자의 귀향 (1966, 렘브란트)

  2024년 청룡의 해가 시작되었다. 새해 벽두부터 가슴 쓸어내리는 사건· 사고가 대내외적으로 발생하였다.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어느 경우든 후유증없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최근 일본에서 발생한 노토반도 지진의 경우에도 10여 일이 지난 이후까지 여진이나 쓰나미 등의 추가적인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비단 천재지변뿐이 아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물질적 정신적 에너지가 그곳으로 쏠리게 되고 그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새로 시간도 투입해야 한다. 평소 관심도 없고 나와는 전혀 상관없던 일에서조차 감정이 요동치고 콤플렉스가 치솟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신호등이 작동되면서 이성적인 본성이 싸움을 준비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잘못에 대해 진단을 하고 그 원인을 따지게 되는데, 마치 지진이 일어난 후 여진이 계속 생기는 것과 같다. 사고 발생에 대비해 만들어 두었던 예비책조차 무용지책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으니, 어디서부터 잘못인지 당혹스럽기도 하다.

  특정 상황을 두고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 수많은 사건 속에 직간접으로 연관된다. 사건을 당한 처음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경우도 있고, 이후 여진이 더 힘들 때도 있다. 반드시 사건의 첫 충격이 커서 사후 여진이 힘든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사소한 사건이 커다란 후유증을 낳기도 한다. 그렇다면 2차 여진이 더 힘들지 않게 하려면 그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은 무엇일까? ‘너도 맞고, 나도 맞다는 식은 답이 아닐 것이다.

  20세기 마지막 영성가로 불리는 헨리 나우웬은 탕자의 귀향에서 바로크 시대의 빛의 마술사라고 하는 화가 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귀향, 1966, 유화>을 깊이 통찰하고 있다.

  렘브란트는 성서 누가복음 15한 집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여 받아 집을 나가 다 탕진하고 거지꼴로 살며 돼지 먹이로 전전긍긍하다가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의 용서와 환대를 받는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 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캔버스에 담을 때, 자신의 죄를 뉘우치듯 머리를 깎고, 너덜너덜한 누더기 옷을 입고, 신발도 다 떨어진 채 용서를 구하는 아들과 그를 감싸 안은 아버지 모습을 그렸다.

  작품에 대한 헨리 나우웬의 통찰을 접하면서, 우리 주변의 탕자는 어떤 태도로 용서를 구하고 책임을 지는지, 또한 우리는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탕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특히 렘브란트는 아들을 용서하는 자비의 순간, 아버지의 두 손을 다르게 그렸다. 아버지의 오른손은 부드럽고 작은 여성의 손으로, 왼손은 굵고 크고 힘있게 남성의 손으로 그렸는데, 주변 목격자들의 시선과 밝은 빛도 이 두 손을 부각시키고 있다. 렘브란트 작품 속 아버지의 각기 다른 두 손은 성숙한 어른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사건이 발생하면 처음에는 사건 자체에 쏠리게 마련이지만, 점차 그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들()을 살피며 신경을 곤두세운다. 무조건적인 제 식구 감싸기인지, 집단따돌림이나 꼬리 자르기인지,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지는지, 심판자의 눈으로 지켜보게 된다. 하지만, 귀환하는 탕자를 두 손 벌려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무조건적인 수용도, 원칙과 규칙에 따라 판단하는 것만도 아닌, 이성적 판단과 감정적 포용이라는 두 손으로 균형감 있게 대처하고 바라봐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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