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은 말한다─ 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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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은 말한다─ 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 #40
  • 역사칼럼
  • 승인 2024.03.1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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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현, 정점주 "4·19땐 유족세상, 5·16땐 죽은 기라" (1)

서울대 법대-한인섭 교수

(지난 호에 이어)

 

  저는 문병현이라고 하고 1927년에 대현에서 태어나 살면서 농사짓고 그랬지요. 6·25 나던 해인데, 그해는 농사가 모두 잘 되었어. 공비 토벌 들어오고 그러니까 불안한 거라. 저녁 되면 산에 있는 인간들이 와서 보급투쟁 간혹 나오거든.

  젊은 사람 보고 따라가자고 하면 안 따라 가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토벌대가 또 짐 지고 가자고 하면 거기도 따라가야지요. 그래서 아버지가 집에 있지 말라고 하는 기야. 농사지을 때 되거든 오라는 거야. 설 머리에 갔어요. 새배인사는 안하고 여기 있으면 안된다고 못 있게 하더라고. 처음에는 산청 정남이라는데, 외가 고모 있는데 거기 갔습니다.

하도 어처구니 없어 눈물도 안 나와

(외갓집에 있는데) 불 지르고, 사람 다 죽였다는 소문이 들려요. 군에 간 사람 가족이나 학살하려고 사람 고를 적에 면장 박영보하고 지서장 박대성이하고 거기 있었거든. 그래서 자기들 아는 사람 가려낸 기라. 그래서 나가려고 하는데 못 나가게 한 거라. 무슨 군인 가족이 이렇게 많냐고···. 그래서 그 이튿날, 닷샛날 가두고 엿셋날 죽였지. 도망이라도 갔으면 좀 더 살았을 텐데. 관료들 가족들이 나와가지고 갈 데가 어디있어요? 동네 불 다 질렀는데···.

  학교에 잡혔다가 나온 사람들이 있으니까 소문이 그 이튿날 났어요. 군경 가족 중에도 죽은 사람들이 있어요. 군인 가족 아닌 사람도 군인 가족 핑계대고 나온 사람도 있고. 김용재(어머니) 같은 사람은 신원국민학교로 소를 몰고 가는데, 소 달라고 하는데 안준다고 길가에서 총에 맞아 죽었거든.

  그래 계엄령이 선포되고 집으로 가지도 못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소문 들으려고 날마다 오는 사람한테 묻는 거라. 결국은 사람은 다 죽고, 불 다 질렀다고···.

  그래 있다가 시체 치운다고 두어 달 지나서(현장에) 갔어요. 까마귀 떼가 날아가 고···. 사람 죽여서 산을 파서 흙을 덮어놨는데, 전신을 짐승이 파고 그랬는데, 가보니까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눈물이 한 방울도 안 나오더라고···. 그래서 손도 못 대고 3년간 그대로 나뒀어요.

  개인이 가서 하나도 찾을 수가 없거든요. 그때 우리가 사진이라도 하나 찍었으면 되는데, 사진 하나 찍을 줄 몰랐어.

  나중에 화장을 하는데, 개울가에 나무를 갖다 놓고 골짜기에 있는 걸 다 파내서 모아가지고, 태워서 지금의 박산 묘지로 이장했어요. 그때가 음력 33, 청명한식이었습니다. 양력으로 4 5일입니다. 3일 동안 그 일을 했지.

  그리고 5·16 나고 나서 봉분 없앴는데, 그 이후에 5년 있다가 국회의원한테 달려들어서 비석은 못 세우고 봉분만 만들었지요.

 

한푼 두푼 모아서 위토 마련

· 그러니까 54년에 남자, 여자, 아동 세 개로 봉분을 만들었고

  두 개입니다. 소아는 가묘비만 있지요.

· 이장을 하고 제문 같은 것도 읽고 했습니까?

  했지요. 김병기씨가 잘하거든요.

· 그때는 방해 받지 않았습니까?

  네.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그 이후 거창사건 억울하다고 쓴 사람들 방명록 다 있지 않습니까면의회에서 적어놨다가 올리는 거라.

· 추진위원회는 53년부터 활동했나요?

  비 세우는 거는 추진위원회에서 다 돈도 거두고 했어요. 그때 추진위원회 대표는 김희주였지요. 그때는 면의회라고 있었거든, 의장은 김희주고 면장은 변영제라. 변영제 면장이 처음에 많이 욕을 봤구만.

· 비가 세워진 것은 6011월쯤이 되는 거죠?

  원래 이은상 선생이 비문에 서기연도를 썼더라고. 면에서 단기로 고쳤지. 신중목 씨가 학자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알고 세계공통연호를 쓴 것인데 함부로 고쳤다고 책망하더라고.

· (문병현씨가 모아놓은 자료를 보며) 신중목 씨가 비문 부탁한 내용이 여기 적혀 있네요.

  그 뒤에 몇 년 지나고 나서 이은상 씨한테 꿀 한 단지씩 갖다 줬어요. 그 이후에 몇 년 지나고 나서 돌아가셨지요. 신중목씨 거창사람 때문에 욕봤구만. 거기는 83~84세까지 살았는데, 언제 죽었는지 안 적어 놓으면 다 잊죠.

· 이번에 다 정리하고 난 뒤에 역사관으로 가야 겠네요. 이 문서는 뭐지요?

  우리가 나락 걷어가지고 위토하려고 논 산 것입니다. 유족들이 다 나락을 내어서 모았어요55년에 나락을 모아서 56년도에 위토를 샀어요2년 동안에 두 필지를 우리가 샀거든. 뒤에 한 필지 더 샀어. 5·16 나고 나서 싹 다 팔아버렸어요. 합동묘소를 위해서 위토를 산 것입니다.

  우리가 모아서 논도 사야 제사를 지낼 비용도 장만하고 그러거든. 54년에 이장을 하고, 55년에 농사를 짓고 가을에 나락을 걷어서 논을 샀어요.

  지금은 (위토가) 없어요. 우리 뒷바라지 하느라고 다 팔아 넣었어요. 거창경찰서에 와가지고 진주형무소 갔다가 서울로, 다시 부산 내려왔다가 부산 군법회의에서 재판받았어요. (우리가) 죄진 게 뭐 있어요? 없는데, 유족회를 반국가단체라고···. 그리고 이건 19601118일에 우리가 비를 세울 때 자료입니다.

· 그때 5월에 처음 세우려고 하다가 박영보 사건이 난 거 아닙니까?

  추진위원회가 그 60년 봄에 결성을 했거든요사고는 (석물을) 산소로 운반할 때 났어요. 제막식을 하려면 산소로 운반하고 나서 해야 되거든유족들이 전부 산소로 운반해 놓고는 술도 먹고 이래 놓으니까.

  그때만해도 우리들은 아무것도 몰랐거든. 이렇게 억울한 것을 당하고, 기록이라도 남기려고 써 둔 것입니다. 내가 서울 다니면서 건의하고 그런 것을 써 놓은 것입니다.

· 석물을 운반하고 유족들이 박영보씨 집으로막 몰려간 거죠? 그래서 어찌 된 겁니까?

 그래가지고 납치를 해서 올라왔지. 올라오다가 중간에서 지서장이 경찰서에 연락을 했거든그래서 동네에서 만났어. 그때 경찰서장이 와서 해결해주겠다고 하더라. 어떻게 해결해주겠냐고 모두 울거든. 그런데 누가 돌을 집어던졌거든. 돌을 집어던지니까 일시에 확 돌이 들어가버렸지. 그래서 타살해버렸지. 그래서 군인들이 막 오고 그랬어.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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