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백
상태바
여 백
  • 사과 농부 백상하
  • 승인 2024.03.10 17: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작년 여름의 비는 농부 입장에서 충분히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중부 지방의 경우 논밭이 다 물에 쓸려가고 축사가 떠내려가는 등 회복하기 힘든 수해가 우리를 힘들게 했다.

  올겨울 비가 심상찮다. 많은 눈과 비가 내렸고, 사과밭에 유공관을 통해 물이 흘러나오는 광경을 본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만큼 많은 비가 왔다는 방증이다. 뉴스를 들어보니 전국 저수지의 평균 저수율이 80퍼센트에 육박한다고 한다. 이런 겨울이 있었던가?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사과 농사를 이곳 거창에서 지을 수 있을까? 가뜩이나 날씨가 좋지 않아 밭에 일하러 간 날은 손에 꼽히고, 진도가 느린 전정 작업은 사람을 더 초조하게 만든다.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 , 무엇 때문에 이렇게 초조해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습관적으로 모든 것이 잘 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늘 따라다닌다. 아마도 학창 시절 부터 따라다닌 최선, 완벽 증후군이 아닌가 싶다.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늘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주위로부터 강요받지 않았던가?

  정작 살아보니 필요한 것은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주위를 돌아보면서 같이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부부 사이에도 매일매일 새로운 갈등이 발생하듯이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갈등 중에서도 그냥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갈등이 있고 원칙에서 벗어나 자신 만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면서 발생하는 갈등도 있다. 갈등에 적절히, 혹은 강력하게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럴 때 중요한 게 삶의 경험에서 오는 갈등 극복 기준이다.

  내부가 탄탄한 사람은 부드럽게 갈등을 극복해 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때그때 본인의 기분에 따라 더 깊어지거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흐지부지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처럼 보통 사람들은 그런 완벽한 기준을 갖고 있지 못하고 후자처럼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랜 세월의 연륜이 필요한 부분이며, 세월만 간다고 그런 것들이 충족되지는 않을 것이다. 좁은 소견으로는 일단 자기 일에, 환경에 만족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사과 농부로서 스스로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농부의 가장 큰 소명은 먹거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 모든 농부가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 한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의사는 생명을 살리지만, 농부 역시 생명을 유지하는 필수적인 먹거리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그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농부가 천직(賤職)으로 폄하되고 있지만, 자발적 농부가 된 나는 농부란 직업에 큰 자부심을 지니고 산다. 농부뿐만 아니라 각종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이 자기의 일과 직업에 큰 자부심을 느끼면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신이 하는 일에 기쁨을 느끼고 산다면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을까.

일상생활이 기쁨이 된다면 삶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여유도 생길 것이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 기준에 대해서도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의 연속으로 정말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완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많지는 않지만, 그런 분들을 뵐 때마다 감동하고, 나도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는 강한 욕구에 사로잡힌다.

  비어 있는 듯한 아름다운 여백을 가지고 싶지 않은가? 본분에 충실하다 보면 본분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과 이 세상에 대해 배려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서 인생은 더 윤택해진다. 나도 농부의 길에서 아름 다운 여백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