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은 말한다 ─ 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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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은 말한다 ─ 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 #41
  • 역사칼럼
  • 승인 2024.03.25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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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현, 정점주 "4·19땐 유족세상, 5·16땐 죽은 기라" (2)

서울대 법대 _ 한인섭 교수
                                   문병현

 

(지난 호에 이어)

· 그때 모인 주민 수는 얼마나 됩니까? 

 한 100명 이상 되었을 겁니다.

· 한 명이 던지니까?

  한 명이 던지고 막 하다보니까 우발적으로 순식간에···.

· 그 다음에 진행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4·19 나고 나서 유족 세상이거든. 5·16 나고 나서는 죽은 기라. 박영보 살인사건으로 잡혀간 사람이 17명 정도였지. 군법회의에서 집행유예 받고 나왔지요. 그런 엄청난 사고를 내놨지. 유족들이 모이면 주장을 하고 엄청났지. 신문에 많이 나고 기자들도 많이 왔지요. 사진도 많이 찍고.

  그때 518일에 잡혀갔습니다. 회장 신병목씨하고 김재덕이하고 용재하고 그래 우리가 잡혀갔지요. 그래 진주로 갔다가 부산, 서울, 부산 고등군법회의에서 16개월 동안 내가 있다가 그 뒤에 정부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말 것을 검사가 각서를 받데. 각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이거야. 나와서 소송해도 된다고 하고. 그때는 그런 줄 알지.

·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잡혀갔죠?

  상부 지시가 있었겠죠. 가니까 교원노조하고 밀수범하고 깡패 하는 사람들 많이 잡아넣었더라고. 가니까 묻는 말에 대답만 하라고. 우리가 행동을 한 게 아무것도 없거든. 경찰부에 가면 최하 10년에서 무기 아니면 사형이라 해. 뭐 모두 죽는 줄 알았지. 서울형무소 가니까 이강훈이라고 광복회장하던 어른이 당신은 아무 죄지은 것도 없는데, 당신은 괜찮소. 밀수범은 그 당시에 사형 당했어. 우리는 재판 몇 번 받고 하다가 집행유예 받고. 주범이 없거든.

유족회 건은 무죄판결 받아

· 잡혀가셨을 때 어떻게 지냈습니까?

  말도 못하지. 유족이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

· 국회에서 또 오지 않았습니까?

  국회조사단 여러 번 왔지요. 내 서울 많이 다녔습니다. 국회조사단도 만났지요. 뭐 다 해준다고 하드만.

· 그러니까 박영보 건은 집행유예 받고, 유족회 건은 무죄 받고···

  네. 그렇지요. 62714일에 거창사건 유족회는 무죄 받고···. 무죄를 받은 사람은 나가서 이야기하지 말라고 배동훈 검찰관이 각서를 받더라고. 각서에 우리가 도장 찍고. 지금이야 뭐 각서도 소용없다 이거라.

· 어르신은 박영보 건과 관련되었습니까? 유족회 건만 관련되었습니까?

  처음에 14일에 저를 안내놓데요. 살인사건이 미결이 되어서 그때 다 안나왔거든. 난 그 뒤에 나왔어. 박영보 건과 관련해서 집행유예 받았죠.

· 유족회 건과 관련해서 무죄 받을 때 피고인 유족들은 몇 사람이었어요?

  살인사건 그거 겸해가지고는 열 몇 명 되었고, 처음에는 4~5명밖에 안 들어갔어. 그때 518 일에 회장하고 부회장하고 간사 들어가고···.

· 그때 무죄판결 받은 기록이 있나요?

  (자료를 가리키며) 그 안에 다 있습니다. 유족회는 62715일인가 다 나왔는데, 나는 못 나오다가 9월 며칠쯤에 나왔어요. 그때 내가 부회장이라, 회장은 신병균이고. 잡혀간 사람들이 나를 다 밀어넣어서 전부 내가 했다고 하는 데···.

· 무죄판결 받았을 때는 기뻤겠네요?

  기분 좋은 것도 없어요. 당연한 일인데···.

· 법정에서는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우리는 (희생자들을) 위령하기 위해서 있는 거고, 합동묘 쓰고 벌초하고 제사지내는 것뿐 딴거 아무것도 없다. 한 게 있어야 반국가단체지.

· 나와서 거창으로 돌아갔습니까? 분위기는 어떻던가요?

  분위기는 내나(이전과) 똑같죠. 내가 구속되어 들어갈 때 딸만 셋 낳았는데, 16개월 있다가 우리 장남을 낳은기라. 그래서 63년생이죠.

· 그리고 87년도까지는 아무 일이 없었습니까?

  우리 형무소 살고 나서는 별 일 없었습니다.

  명예회복하려고 뭐 그런거···.

· 군사정권 때에도 명예회복하려고 노력을 했습 니까?

  박정희 대통령 때도 했는데, 묘를 팠으니 묘를 해줘야 한다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 실장 윤필용이가 답을 했는데, 저희한테는 해당 안된다고 딴 기관에 문의하라고 그래 통지가 왔더라고.

· 그럼, 노태우 정권 때 와서 본격적으로 모여서 명예회복해달라고?

  민주화추진위원회하는데 내가 갔다고. 나는 방청객으로 간 거지, 우리는 그때 진정서를 넣었지. 그런 건 전부 소용이 없어. 나중에 진정서가 전부 돌아가지고 거창군수한테 갔는데 뭐···.

희생자들의 억울함을 일기로 기록

 

                                                                          문병현

 

(문병현 씨가 모아놓은 자료를 보며)

· 이 서류는 60년도에 박영보 씨가 죽고 난뒤에 기자들도 오고 하니까 전체 진상이 이렇고, 우리를 처벌하려면 가해자도 처벌하라는 취지에서 써 놓은 글이네요?

  예, 전부 제가 썼습니다. 1960, 그때 제가 서른 대여섯 살 되었죠. 25세에 사건이 나고 10년 후에 그걸 썼거든요. 10년 후인데, 군사정권이 우리를 잡아넣고 우리가 나오고 나서도 얼마나 우리를 뒷조사를 하고 그랬는데···. 우리가 징역 살고 난 뒤에 정부에 대해서 항의 안한다는 내용으로 각서를 쓰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각서를 쓰고 그래 나왔거든. 나오고보니 각서 그거 소용없고, 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 이거라. 징역산 것도 찾아 먹을 수 있다고···. 각서 쓴 거 아무것도 아니라. 그렇게 순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이런 글들을 한 10년 동안 썼더라고···. 내가 유족회를 34년 동안 하면서 회장도 하고 앞장서서 했습니다. 내가 위령제를 지낼지 몰랐거든. 여기 희생자들은 다 박산골 희생자들이거든. 탄량골, 청연골은 다같이 희생을 당했어도 단결이 안 되고, 묘를 찾아 놓으니까 하다가 희미하게 되고 말았어요. 우리는 묘를 써 놓으니까, 합동묘를 해 놓으니까 해마다 벌초하고 관리 했습니다. 그래서 96년도인가 이래서는 안된다, 합쳐서 위령제를 지내자. 그래서 국회의원도 부르고 서울을 많이 오르내렸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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