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머거리 집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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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머거리 집 ④
  • 박혜원(소설가)
  • 승인 2024.03.25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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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화 : 김녹촌
                                                                  ▲ 삽화 : 김녹촌

  차도 들어오지 않는 외길을 따라 개울을 건너 좁은 논둑길을 걷다보면 공동묘지 밑 잡목이 우거진 숲속에, 밖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자그마한 외딴집에 이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방치되어 있던 빈집. 나는 그 당시 그 외딴집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 모든 것을 잃어 돈도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 집에 스스로를 유폐시키며 침잠했다. 신문도 끊고 전화도 끊고 카드도 잘라냈다. TV도 없고 내 명의로 된 그 무엇도 없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내 몸을 의탁했던 그 집을 귀머거리 집이라 명명했다.

  그 귀머거리 집에서 가장 예민했던 것은 소리에 대한 감각이었다. 황량한 들판을 지나면서 더욱 키워지는 겨울바람, 한 겹 블록 벽 사이를 파고드는 냉기의 흐름, 창호지 문틈으로 밀려드는 바람 때문에 가늘게 떨리는 문풍지 소리, 얇은 슬레이트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과 사락거리며 내려앉는 눈의 소리아침 일찍 낯선 사람들을 향해 짖어대는 까치와 고사목 둥치를 두드리는 딱따구리, 산수유 열매를 먹으러 날아드는 동박새, 오죽 사이로 부산스럽게 몰려다니는 굴뚝새들의 지저귐과 날갯짓 소리, 한파를 달래려고 피워놓은 무쇠 난로 속에서 나무가 타들어 가는 소리, 보글거리며 끓는 주전자의 물소리나는 철저한 고독과 가난 속에서 오랫동안 빈들의 외딴집에 웅크리고 앉아 그 모든 소리들을 지켜보며 들었다. 잡다한 일상의 소리를 뛰어넘는, 그 소리 속에 담겨 있는 은밀한 삶의 의미에 귀를 기울였다.

  공동묘지 밑 바람벽으로 된 귀머거리 집’, 바람소리, 빗소리가 방 깊숙이 파고들던 집화장실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어둠을 이용해 삽을 들고 다니며 밭에 볼일을 보고 다녔지만, 그랬기 때문에 두터운 적막 속에서 움이 돋아나고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귀머거리 집의 작은 방에 칩거하며 절망과 맞닿아 있었지만, 그러나 죽음 같은 허무와 침묵을 통해 나는 그동안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위대한 침묵>은 해발 1,300m 알프스의 깊은 계곡에 자리 잡은,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 원에서 살아가는 수도사들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이다. 이 영화에서 수도사들은 말이 없다. 그들은 철저한 침묵 속에서 자연의 소리를 그리고 신의 음성을 듣는다. 수도사들은 스스로 소리를 내지 않고 귀로 인지할 수 있는 소리 저 너머의 소리, 영혼을 울리는 절대자의 소리를 듣는다. 침묵은 내면으로 침잠하게 하며 자연의 세계 너머로 자신을 열어둔다. 영혼의 울림, 초자연적인 소리를 들으려 자신의 말은 닫아두는 것이다.

  지금 나의 일상은 온갖 소리들로 넘쳐난다새벽부터 울려대는 모닝콜, TV, 냉장고, 컴퓨터 돌아가는 소리, 자동차 소리, 먹고 사느라 만들어내는 이웃들의 크고 작은 소리, 내가 옳다고 외치는 소리온통 자극적인 잡음들로 가득하다. 이런 시끌벅적한 삶의 자리에서 소음을 소음으로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갈 때가 많다. 거대한 소음의 물결에 파묻혀 정작 들어야 할 소리는 내 삶의 현장에서 멀어져갔다.

  모든 사물이 매순간 나를 향해 속삭이며 들려 주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인생의 비밀을 담은 미세한 울림은 아예 들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세속적 욕망으로 가득한 일상의 삶이 내가 진정 들어야 할 소리에 대해서는 귀머거리로 만들고 있다. ‘잎새에 이는미세한 바람소리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의 영혼의 예민함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참으로 역설적이어서 들리면 듣지 못하고 보이면 보지 못한다. 오이디푸스 처럼극한상황에 내몰린 가장 막막한 순간에 비로소 가장 아름다운 소리, 진정 들어야할 소리를 듣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지금 너무 많은 소리들로 인해 진짜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고요 속에 미세한 소리가 주는 삶의 신비로운 비밀들, 움을 틔우느라 겨우내 두텁게 감싸고 있던 나무껍질이 터지는 소리, 나무그늘에 일렁이는 초록빛 잎새 소리, 잎사귀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바스락거리며 굴러가는 낙엽 소리, 삭정이 위로 사락거리며 내리는 눈의 소리를 듣기 위해 침잠하며 귀 기울일 일이다.

  ‘귀머거리 집에 가득하던 침묵의 깊은 메아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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