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대교약졸(大巧若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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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대교약졸(大巧若拙)
  • 한들신문
  • 승인 2022.10.1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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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소설가)

나에게는 아버지가 남긴 서예작품이 몇 점 있다. 그 어느 것인들 애착이 가지 않겠냐마는, 그중 제일 좋아하는 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쓴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투병 중이었는데,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내가 애송하던 성구를 써 달라고 졸랐다. 
  그 성구가 담긴 액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땜질한 흔적이 있다. 긴 구절도 아닌데, 틀린 글자를 고쳐서 그 글자만 붙여 넣었다. 그런데 자그마한 액자에 큰 흠이 될 수도 있는 이 땜질이, 한지에 음영을 이루며 묘하게 어우러지고 있다. 

  젊은 날 아버지는 자주 이문열의 단편소설 <금시조(金翅鳥)>를 이야기하곤 하셨다. 
  금시조는 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로 ‘가루라’라고도 한다. 머리는 새, 몸은 사람인데, 날개는 금빛이고 부리로 불꽃을 내뿜으며 용을 잡아먹고 산다고 한다. 소설 <금시조>의 내용은 이렇다.
  고아였던 서예가 고죽은 석담 선생에게 맡겨진다. 석담은 ‘예'보다 ‘도’를 우선하는데, ‘도’보다 ‘예'가 더 센 고죽의 작품 세계를 못마땅해한다. 석담은 ‘서화는, 물(物)을 빌어 내 마음을 그리는 것인즉 반드시 물의 실상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한다. 고죽은 스승과는 달리 보편적 원리로서의 도를 인정하지 않고, 한 인간의 삶과 마찬가지로 서예 역시 독특하게 추구되어야 할 상대적인 것으로 본다. 나중에 죽음에 임박한 고죽은 자신의 작품을 모두 거두어들여 불태운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이 산화된 불꽃 속에서 금시조의 환영을 보며 죽음을 맞는다.
  일생 동안 그를 이끈 미적 총결산인 자신의 작품을 자기 손으로 불태운 고죽의 행위는,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서 존립하는 독자적인 세계이지 다른 무엇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예술지상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다. 고죽의 행위가 유미적이든 공리적이든 결국 자기부정을 통해 예술이 완성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이 ‘도’냐 ‘예’냐에 대한 판단이 어떠하든지 간에 아버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철저한 완성을 추구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은 흠이 있으면 여지없이 버렸다. 그럴 때 엄마가 몰래 챙겨둔 작품이 더러 있는데,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전혀 모자람이 없는 걸출한 작품이다.
  어쨌든 젊은 날 아버지가 쓴 글은 기개가 넘쳤고 법도에 엄정했다. 어떤 글에는 바위를 뚫는 폭포의 줄기찬 기운이 가득했고 어떤 글은 하늘을 향해 치솟는 열정으로 끓어올랐다. 단 하나의 글자라도 줄을 벗어나 전체의 조화를 깨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단 하나의 획도, 역필의 기운이 약하면 종이를 구겨버리셨다. 서예를 배우는 어린 딸에게도 그 철저함을 가르쳤다. 나는 그때의 아버지를 추억하며 <벽(壁)>이라는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러던 아버지가 글자 하나를 틀리게 썼다. 예전 같았으면 종이를 구겨버리고 아예 글 전체를 다시 써야 했는데, 그냥 틀린 부분만 잘라내고 땜질을 한 것이다. 누덕누덕 기운 누더기처럼, 새로 쓴 조각을 오자 위에 떡 붙여 놓았다. 그러니까 그때의 아버지는 모든 형식과 기교를 뛰어넘었던 것 같다.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환동(還童)’이라고도 한다. 어린이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도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많은 병고를 치르던 아버지는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외손자와 똑같이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장난쳤다. 그 외손자를 시뻘건 포대기로 싸서 업은 채 손님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규범과 법을 버린 모습이었다. 아니 그 모든 것을 안고 넘어선...
  그때의 글을 보면 글씨 자체도 마치 아이가 장난친 것처럼 삐뚤삐뚤하다. 그러면서도 안정되고 전체적으로 어색하거니 어긋남이 없다. 가는 듯하면 어느새 연약함을 벗어나 있고 굵어진다 싶으면 그 끝은 벌써 중도를 지키고 있다. 법에서 벗어남이 없되 법에 구속됨 없이 자유롭다. 글이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 예술이란 저런 것이야 한다는 그 어떤 전제도 없다. 진정 자유롭다. 고목이 된 매화나무 꽃 위로 나비가 나풀나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모습이다. 진정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는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대교약졸1)’이다.

  [노자]의 경구 하나가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예술에 대한 생각을 일깨운다. 나는 언제쯤에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자유로움이 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될까? 나는 ‘대교약졸’을 생각하면서 나의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1) 대교약졸(大巧若拙): 노자 도덕경 45장에 나오는 말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큰 기교는 졸렬함과 같다’이다. 기술이 성숙하여 극에 이르면 그런 기교를 떨치고 본래의 순수함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필자의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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