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은 말한다-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_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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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은 말한다-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_14
  • 한들신문
  • 승인 2023.01.2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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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법대 한인섭 교수

박주야, 울 어머니 아직 못나왔는데, 문 닫아버리면 우짜노

거창사건 생존자 박주야. 본 책에서 발췌.
거창사건 생존자 박주야. 본 책에서 발췌.

저는 박주야라고 하고 올해 육십여덟이요. 난리 때는 그때가 정월달이니께 열세살이었지. 그때 집에 있는데, 군인들이 고마 니집 내집할 거 없이 들이닥치는 기라. 마당에 서서 쳐다본께 저 건너 마을에 집들이 시뻘거이(시뻘겋게) 타들어가는 게 보여. 쪼매 있응께 군인이 우리집에 오는 기라. 군인들이 욕을 하고 그런께네 우리 어무이가 벌벌벌벌 떨더라꼬. 불을 지르면서 사람들한테 나오라 카는 기라.

살라면 나오고 타 뒤질라면 뒤지고.”

와 가꼬 나가자카대. 아무것도 가지고 못 나오게 하고. 내 동생이 둘이었어예. 둘인데, 어무이가 하나 업고, 내가 하나 업고. 그래 인자 몸뚱이만 나왔어. 나오니께 밖에 동네 사람들이 많이 있더라코. 조금 있응께 동네도 연기가 덮여가지고 아무것도 안 보여. 조금 있응께 군인들이 앉으라캐서 앉았어. 또 조금 있응께 군인들이 아래로 가자카대.

 

교실문이 닫힌 순간이 생사의 갈림길

우리는 외갓집이 한 동네였거든. 그래서 외삼촌네랑 같이 가는데, 가다봉께네 한재 동네라 카는 데로 그리 데리고 오더라고. 내려오면서 군인들이 무슨 연설하는 소리를 우리는 쪼그매논께 똑똑히 못듣고. 그럭저럭 내려와서 학교 교실로 들어온께 (밤이라) 캄캄한 기라.

그 밤에 누가 저녁을 주는 사람이 있나, 모두 살끼라고 이불 보따리도 한 개 짊어지고 왔는데 (군인이) 막 확 뺏아 집어던져불고. 쪼매 있응께 전등 요만한 걸 가지고 댕기면서 다는 기라. 그래 불빛에 언뜻 보니께 남자들만 다 나가. 그러고로 (군인들이) 들락날락 하면서 밤새도록 (사람들) 두들겨패고. (군인들이) 얼마나 두들겨패는지 말도 몬해. 그리고 와 그리 욕도 잘 하노? 우리들 땜에 즈그들 욕본다코 생각하는 기라. 시방 가만 생각해 보면. 야그를 하면 끝도 없어예.

그리고 아침이 되니까 해가 훤하니 떴어. (군인들) ‘다 나오라칸께로 사람들이 막 밀어붙여. 뒤에서 미는 바람에 밀려와서도 앞으로 콱 엎어져뿌렀네. 그라고봉께 고마 교실 문이 닫혀져 있는 기라. 어무이는 안에 있는데. 어떤 놈이(군인이) 하나 오더니 왜 사람들이 이렇게 많냐면서 교실을 콱 닫어버리니께 아무도 못 나와. 그래서 마당으로 나오니께 그때까지도 우리 어머니랑 동생이 안나오는 기라. 할 수 없어서 외갓집 따라다녔어예. 그래서 마당에 모였는데, 저는 외갓집, 거 붙어서 아랫동네로 가서 주먹밥을 일주일인가 얻어먹고, 일가 친척 있는 사람들은 그리고 가라 카대요.

 

한창 젊을 때 세상 떠난 게 가장 안타까워

Q> 원래 사시던 데가 어디였습니까?

신원에서 살았어요. 거기서 커서 거기로 시집갔어예. 불난 동네로. 그니께 신원면 와룡리 비곡마을에서 중유마을로 시집 갔어. 그랬는데, 시방도 새카만 군인들이 날뛰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눈앞에) 삼삼해.

 

Q> 군인들 하면 뭐가 생각납니까?

아이고 짚단을 들고대니면서 불도 잘 질러요. 난중에는 동네에 연기가 자북하이 아무것도 안보여. 그런데 어떤 할마이가 딸이 안 나왔다 카면서로 연기 속으로 들어가요. 그러니께 군인들이 막 총을 쏘데. 그래도 연기 속이라 그런지 안 맞았어. 그래가 딸을 기어이 데리고 나옵디다. 불에 데어서, 몸이 오그라져서 말도 몬해요. 그 딸이 갑수라꼬. 이름도 안 잊어삔다. 그래가 장마철에 죽었다고 해.

, 군인들이 교실 안에서 나오라 카길래 저는 외갓집만 따라서 나왔는 기라. 엄마가 안 나왔으니께 울고 댕기고. 그런데, 우체국장이 있었는데, 내가 우리 엄마 안왔다카니까 가자, 엄마 뒤에 올끼다, 가자그라면서 내 손을 잡아. 내가 그래도 뿌리친께 그 양반도 고마 내삐는기라.

그리고 총소리가 깨 볶듯이 나는 기라. 외삼촌이 나를 콱 안으면서 전부 다 쥑있단다. 올라가지 마라.” 그게 뭔 소린가 했어. 뭘 다 죽였다 카는 긴고? 그래도 외갓집에 붙어 거기서 있었는 기라. 나중에 들은 애긴디, 시체가 나무 등걸처럼 디비져있다는 기라. 우리 아부지가 우리 어무이하고 동생들 찾으러 가니까, 시체가 나무 등걸처럼 돼있었다 카대요, ‘그게 꼭 고등어 구워논 것 같다고 카면서 평생을 고기를 안 잡쉈당께. 징그러워서. 말도 말도 몬해.

그때 우리 삼촌, 숙모, 동생도 둘이나 죽었고, 어무이도 세상을 버렸고, 그렇지요. 한창 젊은데 그렇게 세상을 버린 게 가장 안타깝지, 그게 원통하지 뭐. 아버지는 그날 아침에 쌀 한가마니를 차황인가 어딘가 갖다 놓고 온다꼬, 피난가면 드신다꼬. 그래 아부지가 그걸 짊어지고 간 연후에 그 난리가 났다 카니께. 정월 초닷샛날이라. 날도 안 잊어뿐다.

, 그날 우리 마을 사람이 딸을 하나 낳았거든. 초닷샛날 태어나 가꼬 안고 ㄱ실에꺼정 왔는데 다 죽여삐렸어.

 

Q> 교실에 하룻밤을 잤지요? 교실 안의 모습이 어땠나요?

날이 어둑어둑해가꼬 들어갔어요. 겨울이니께 다섯시 정도 됐는가. 지금도 그 생각하면 잠이 안 와예. 비좁아서 누울 데가 없어예. 쪼그리고 앉았어예. 군인들이 칠판 같은 데 밑에 서서 사람들 두드려패는 것 그것만 뵈지 뭐, 모르겠어요. 군인들이 밤새도록 두들려 팼어요. 요령도 없이, 젊은 사람이든 나이 많은 사람이든 안가리고 팼어예. 대작대기(대나무 막대기)로 패다가, 그 놈이 깨지니께네 다른 거 가지고 패고 그러데요.

 

Q>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는 어디에 살았습니까?

일 나고 나서예? 3년 동안 차황 여시래이라 카는 동네에서 살았어요.

 

Q> 그 불 탄 동네에는 다시 사람들이 안 들어와 살았나요?

아니요. 돈 좀 있는 사람들은 집짓고 농사짓고 살았어예. 그 일이 있고난 뒤에 우리 아부지는 모든 것이 고마 귀찮아져버린 기라. 그래도 정신 차리고 살았지. 나도 인자 아버지 밥 해줘가면서 살았고.

 

Q> 이런 말씀을 누구에게 한 적 있으세요?

아이고, 이래 와서 물어보지 않아도 친구들끼리 만나면 그 이야기하지요. 나는 우리 아들한테도 해줬어예.

-박주야 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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