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은 말한다-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_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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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은 말한다-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_34
  • 한들신문
  • 승인 2023.12.06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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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법대 한인섭 교수

···211호에 이어서

누이동생하고 한두 달 정도 떨어져 있었지요. 그래서 이튿날 아침에 어머니, 아버지 묻은 데를 가보니까 어머니, 아버지 입은 옷을 여우들이 다 찢어서 옷이 없어요. 이상하게도 옷만 없고 해서 제가 다시 산소를 썼습니다. 산소를 쓰는 날 비로소 작은 아버지하고 친척들하고 와서 남동생을 거기다 묻고 했습니다.

군인들이 소를 다 잡아가

  우리 누이동생이 내가 어디 갈까 싶어서 잠을 못자는 겁니다. 다음날 작은아버지한테 꾸중을 듣고. “너희 소를 동네에서 기르고 있는데, 군인들이 관리하고 있다.”라고 해서 가보니까 바로 가보니까 우리 소예요. 그래 보니까 소를 보고 울고 하는 걸 군인이 보고 하더니, 나보고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 가니까 농업학교에 보급부인가 있었는데, 저한테 안에 들어가면 장교가 있는데, 얘기 잘 하라라고 하더라고요. “말 잘못하면 큰일 나니까 사실 그대로 얘기하라라고 하더라고요. 들어가니까 장교가 발로 차면서 저를 총살시키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여동생이 창문으로 넘겨 봤던가봐요. 나오는데, 상사가 뭐해. 장전해. 따라와’, “앞에 가면 구덩이가 있는데 상사가 총을 쏘면 구덩이로 들어가라그런 겁니다. 걸어가는 중에 총을 쏘는데, 제가 구덩이로 들어갔습니다. 그래 (구덩이로 들어가) 가만있었습니다. 있으니까 조용해요. 그래보니까 일어나라고 그래요. “다 갔어 일어나.” 일어나니까 사병 둘하고 저하고 걸어오는 과정에서 얘기하는 거예요.

  그때 소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여러 사람이 있었습니다. 소 찾으러 오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데, 쫓아버린 거야. 그래 (저희) 소를 찾아 주는 거예요. 그래서 소가 자꾸 뒤를 쳐다보다가 나를 밀어요. 여동생은 내가 죽은 줄 알고 새파랗게 질려가지고. 소를 풀렀는데, 도망을 안가고 옆에 사람이 가면 받아요. 그래 내가 나가서 짚을 주니까 안 먹어요. 작은아버지가 소를 마당에 넣으라고 해요. 소를 넣고 시레기를 주니까 먹어요.

  여동생이 나보고 어떻게 살았냐고 그래요. 자초지종을 얘기하니까 막 울고 그래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군인들이 한 마리도 남김없이 소를 다 잡아간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36마리인데, 스물 몇 마리를 군인들이 가져간 거예요. 그 중에 반 이상을 군인들이 팔아먹은 거예요. 그래서 소를 먹일 데가 없어서 이틀 있다가 작은아버지가 팔자고 했는데, 어떻게 파냐고 해서 외갓집으로 몰고 갔어요. 외삼촌이 잘 몰고 왔다고 하면서 필요하면 집에서 시레기 먹이라고 한 겁니다.

오빠는 공부해라

  그때부터 실질적으로 고생에 들어갑니다. 그때부터 봄이니까, 농사철에 들어가니까..., 여동생이(자기는) “식모살이할 테니까 오빠는 공부하라는 겁니다. 농사를 짓니 마니 하는 그런 단계의 고민입니다. 내가 고집을 세워서 농사를 1년만 지어야 겠다.” 그래서 유일하게 제가 1년간 농사를 지었습니다. 내가 시골에 살아도 일을 해 본적이 없었는데, 매일 가서 잡초 뽑고 그러니까 일년간 피가 안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때 제일 좋은 논을 열 마지기를 지었어요. 비료 하나 없이, 메뚜기 밭이 될 정도로 지었는데, 쌀이 일곱 섬인가 나왔습니다. 한 섬인가는 동네 어른들하고 잔치를 한번 하고, 여동생을 위해서 외갓집에 쌀을 갖다 주고, 절대로 식모살이 못하게 하고..., 그래 그 해 51년도 11월 달에 부산에 갔습니다. 가니까 학기가 늦어가지고, 편입시험이 있어서 편입을 한 겁니다.

 

공비 가장하고 국회조사단 기습한 군인들

  51년도에 거창에 돌아와서는 어디서 지냈습니까? 불 탄 집에서는 아무도 안 살았습니까? 51451년 말까지 거창 지역의 모습이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불탄 마을에는 아무도 안 살았습니다. 농사를 지으러 가니까 군인들이 진주하고 있었고, 경찰들이 신원에 사람을 못 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외갓집 육촌형님이 국회조사단이 온다는 지금 야단난 거 알고 있지? 사람 죽인 군인들이 국회조사단이 온다고 하니까 검은 칠하고 군복 벗어놓고 난리친 거 알고 있나?” 그 군인들 옷을 누님이 숨겨놨어요. 군인들이 옷 찾으러 올까봐 걱정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겁이 나서 국회조사단을 습격한 부대를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어요. 그러니까 옷을 찾으러 올 리가 있겠어요? 그래서 그 옷을 제가 집어 들고 신중목 씨에게 뛰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중목 씨가 너 살아 있구나하면서 국수 먹어라하더라고요. 가니까 경찰관, 헌병들이 신중목 씨 집을 담장을 쳐서 못 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저는 옛날부터 알았던 뒷문으로 들어갔어요. 그래서 신중목 씨에게 보따리를 풀어(옷을)보여주면서, 계급장 달린사람 옷을 세 벌을 주면서 한 명은 장교이고, 두 명은 사병이라고, 군인들이 공비로 가장한 것이라고 하니까 신중목 씨가 주저앉더니 내가 속았구나했습니다. 신중목 씨가 목소리가 큽니다. 호통을 치는 거예요. “이놈들이 죽을라고 환장을 한 놈들이지계급장하고 이름하고 내놓고 데려 오라는 거예요. 경찰들하고 군인들이 의원들을 에워싸고 있던 때인데 신중목 씨가 다 필요 없다, 나 혼자 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군인들이 가장했다는 것을 최초로 말한 것이 신중목 씨입니다. 나는 뒷문으로 살짝 나와서 거창극장으로 가서 아는 형한테 말만 퍼트려 주고 나갔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빨갱이로 변복해서 기습했다는 소문이 퍼진 겁니다. 국회조사단은 이틀간 격론을 하다가 경찰서로 불러서 조사를 하자고 결론이 났습니다. 시골서는 저를 명이 길라고 길수라고 불렀어요. 그때 누가 날 증언으로 세웠냐면, 노태준이 라고 그 형이 명단이 끼워 넣은 거예요. ‘이철수를 증인으로 세우라, 그래서 명단에 끼웠는데, 괄호하고 학생이라고 썼어요. 그래서 증인명단에 들어가 있었는데, 기다리고 있는데 소식이 없어요. 그래서 이상해서 나가니까, 김예운 씨라고 만났는데, “너희 자형이 국회조사단에게 말해서 하기로 했는데, 둔갑이 되었어라고 하는 겁니다. ‘빨리 도망가라는 거예요.

이철수로 살 수 없어 이름까지 바꿔

  아까 그 증인 명단에 이름이 있었다는데, 김정욱 씨를 증언을 했는데, 어르신을 왜 안했는지요? 저는 학생이고, 김정욱 씨는 어머니도 죽고 유족이고 하니까 증언을 대신 한 겁니다. 그 고비가 군인들 쪽에서 보면 다행인 것이고, 유족들 측에서 보면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게 지금도 후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봉순이가 밑에 형사들하고 같이 증언을 다 짠 겁니다. 신원사건을 전체적으로 보자면, 지금 지내고 나니까 그게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나중에 부산에 외사촌형이 출장차 온 겁니다. 내가 학교에서 우수상을 받았는데, 그날 외사촌형이 온 거예요. 그때 종이로 접은 꽃을 제가 꽂고 오니까, 축하한다면서 앞으로는 형으로 생각하지 말고 부모로 생각하고 열심히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실질적으로 올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거창사건 좀 잘못될 것 같다.”고 하는 겁니다. 외사촌형은 그래서 가고, 범일동으로 가니까 박순유 형이 와서 군대 간다고 하는 겁니다.(박순유 형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물장사를 했습니다. 그걸 해서 학교를 다닌 겁니다. 군대간다고 하면서 밤새도록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이튿날 보병학교로 간 겁니다. 그래 헤어졌어요. 그 분이 52년에 군대 들어가고, 나는 부산에 있는데, 이듬해 난데없이 연락이 왔는데, 여동생이 결혼식을 했다는 겁니다. “한 동네에 내 잘 아는 친구하고 결혼식을 했는데, 정두옥이라는 애하고 결혼식을 했다.” 저한테 알리지 말라고 하고 비밀리에 결혼식을 한 거예요. 그래서 부산에 있는데, 방 비서가 자는데 찾아왔어요. 돈도 가져오고 뭘 가져와서 격려를 해주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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