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와 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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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와 면우
  • 한들신문
  • 승인 2023.12.0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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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신용균

현인은 명승을 찾고, 명승은 현인으로 인해 빛난다. 추로의 명성에는 공자와 맹자가 있고, 도산과 석담에는 퇴계와 율곡이 있다. 그래서 수승대 산고수장(山高水長)비문에는 어진 사람이 살았던 곳에는 그 유적이 전하는 바가 있고, 산수의 빼어남이 반드시 인물과 서로 어울린다라고 했다. 거창은 예로부터 산수로 이름난 고장이니, 어찌 그에 걸맞은 인물이 없었겠는가. 그중에서도 동계와 면우가 으뜸이다. 옛사람을 벗하는 것을 상우(尙友)라고 한다. 동계와 면우는 당대 거창이 낳은 일국의 선비였으니, 그와 벗하여 대화하지 않으면 지혜롭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동계 정온은 위천 사람이다. 정인홍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으며, 정인홍의 스승 남명 조식을 찾아 예를 갖추었다. 그러니 정온은 조식-정인홍으로 이어지는 경상우도 학파의 정통을 이었다. 시운도 좋았다. 광해군 때는 북인 천하였다. 그가 문과에 급제해 벼슬에 나섰을 때, 스승 정인홍이 대사헌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으니, 출세의 길이 훤히 열린 셈이었다. 그러나 지조 앞에서 출세를 버렸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인 사건이 일어나자, 정온은 그 일을 처리한 강화부사 정항을 참수하라는 과격한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은 크게 분노했다. 정인홍도 국문을 청했다. 결국, 제주도로 유배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거기서 10년을 보냈다. 이 일은 스승을 배반한 것으로 반역과 똑같이 취급되었으니, 영화와 명성을 죄다 버린 셈이다. 그때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반정 후 북인은 몰락하고 정인홍은 사형당했다. 서인 정권이 들어섰고, 정온의 지조가 추앙되어 유배에서 풀려나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등 요직을 역임했다. 그것도 잠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조는 굴욕적으로 청나라에 항복했다. 정온은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죽으려고 배를 갈랐다. 겨우 구제되어 거창으로 실려 내려왔으나 왕이 치욕을 당했으니, 신하의 죽음은 이미 늦었다. 어찌 처자식의 봉양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며 모리재에 들어가 세속과 발길을 끊은 채 인조 19, 1641년에 생애를 마쳤다.

  면우 곽종석은 정온보다 400여 년 후에 태어났다. 산청군 단성 출생, 단성은 남명이 살았던 곳, 어려서부터 유학에 심취하여 20대에 이미 명성이 났고, 당대의 유학자 한주 이진상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곽종석이 거창으로 이주한 때는 1896, 이미 국운이 기울고 있었다. 정부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번번이 사양하였고, 1903년 고종황제를 독대하여 구국의 의견을 상주하고 귀향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이름을 바꾸고 은둔했다. 그러던 중 3·1운동이 일어났다.

  1919, 3·1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어느 날, 심산 김창숙이 곽종석을 방문했다. 김창숙은 이진상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던 후배, 고종 인산일에 상경하여 만세운동을 목격한 후 유생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 위해 곽종석을 찾았다. 곽종석이 유생독립선언서의 선두에 서 달라는 것, 그는 이때 자신이 죽을 때가 온 것을 알았다. 그때 나이가 74, 제자를 각지로 보내 독립선언서에 동참할 지사를 모으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했으니, 그것이 파리장서. 지금 거창읍 침류정 앞에 파리장서비가 서 있다.

  김창숙은 전국의 유생 137명이 서명한 파리장서를 들고 상해로 향했고, 일제 헌병은 곽종석을 체포하여 대구로 압송했다. 이미 조국을 위해 죽음을 결심한 노학자에게 일제의 고문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곽종석은 죽음이 다가왔을 때 석방되어 거창으로 돌아와 생애를 마쳤다. 이로써 거창은 유생 3·1운동의 발상지가 된 것이다. 가북 다전에는 그가 살았던 유적지가 남아있고, 최근에는 곽종석 전시관과 함께 단정하게 복원되었다.

  동계와 면우는 서로 살았던 시기가 멀고 태어난 곳이 달랐지만, 지향점은 하나였다. 그것은 지조, 경상우도 남명학파의 신조인 경()과 의()가 거창에서 열매를 맺은 것이다. 거창은 그런 곳이다. 근래 군청 공무원의 성 추문 사건은 거창을 크게 흠집 냈다. 스스로 수치를 모르면 변화가 없는 법이니 공무원은 두 분을 보고 깨칠 일이며, 아랫사람은 윗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추종하는 법이니 군수는 자신을 두 분에 비추어 볼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몸은 거창에 있어도 정신은 거창을 등진 것이니, 오늘 동계와 면우를 다시 생각해 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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