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아버지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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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아버지라는 이름
  • 한들신문
  • 승인 2022.05.23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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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인 백상하

세상을 살면서 그 존재의 감사함에 대해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물과 공기가 그렇고 부모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다. 그저 옆에 있으니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지만 그들 존재 없이는 우리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더라도 초라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그 소중한 존재들 중 가장 천대받는 게 아버지라는 이름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머니가 60세 전에 세상을 버리셨으니 25년도 훌쩍 넘은 일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 후 나는 그 당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한때 어머니와의 추억 찾기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한 선배와 술 한 잔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질문을 던졌다. “형, 어머니가 너무 그리워요.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돌아가시면 어머니가 훨씬 더 그립겠죠?” 질문이라기보다 동의를 구한 거였다. 그 형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 형은 나와는 반대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여읜 것은 인생의 나침반을 잃어버린 것과 같아”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나는 당시 그 대답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성격이 급하셨고 대인 관계도 원만하지 못해 한 직장에 오래 다니시지 못했고 당연히 생계는 엄마가 책임지는 부분이 더 많았다. 그런 분이 내 인생의 나침반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나침반이 될 수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고등학교 시절 한참 예민하던 그때 아버지는 술만 드시고 오면 잠자던 나를 깨워 놓고 하는 훈계가 당신께선 능력이 모자라 대학교를 보내줄 수 없으니 공부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맨 정신으로는 아무 말도 못 하시던 분이 술만 드시면 술의 기운을 빌려 나한테 심한 말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능함을 우리에게 짜증으로 돌려주셨고 우리 남매의 유년 시절은 썩 그리 밝지는 못했다. 우리 남매는 모두 결혼을 해서 분가를 했고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는 홀로 사셨다. 
  내가 거창으로 귀농할 무렵 아버지를 찾아뵙고 나랑 같이 거창으로 가서 농사를 지으시겠냐고 물었더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같이 가겠노라고 하셨다. 연세가 드신 아버지는 예전처럼 술도 많이 드시지 못했고 나를 대접해 주신 것인지는 몰라도 막말도 하지 않으셨고 나를 믿고 의지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거창으로 내려오신 후 아버지는 표정이 많이 밝아졌고 농사에 대한 열정으로 남은 인생을 채웠다. 약간 티격태격 하긴 했지만 아버지와 나는 농사 영역을 분리하면서 무난하게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며 부자간의 정을 돈독히 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는 중병을 얻으셨고 이곳 거창에서 치료가 되지 않아 부산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치료를 받으셨다. 병원 가실 때마다 내가 직접 부산까지 차로 모셨고 부산을 오가며 차 안에서 진정한 대화도 나눴다. 그때 왜 그렇게 하셨냐는 물음에 만족한 답을 듣진 못했지만 내가 몰랐던 여러 가지 사정과 아버지의 입장을 듣다 보니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몇 해 전 세상을 버리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그 선배의 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나침반이 되든 되지 않든 간에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 아버지가 어떤 행동을 하고 말씀을 하셨든 그 이면에 있었던 아버지의 사랑은 진심이었고 그것을 가슴 깊이 새기는 것, 이것이 진정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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