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단상] 가을걷이 기억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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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단상] 가을걷이 기억소환
  • 한들신문
  • 승인 2022.10.1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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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인 정애주

소리가 안 나온다. 평생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문득문득 치받듯 울컥한 이 기분은 내 노래가 오장육부 어디에선가 저를 기억해 달라는 신호인가 보다. 그래서 울컥한다. 가끔 그리고 자주. 이 연민의 감정은 스무 살 나를 불러내어 인생의 여름 땡볕을 알지 못하던 청년 시절 오만하고 자신만만했던 감정을 즐긴다. 이 시간은 때때로 달달해서 그 우월감이 주는 감성의 허상에 잠시 흐뭇 웃는다. 이 우쭐거림은 한여름 작렬하는 햇빛과 몰아치는 바람과 폭포 같은 비를 맞으면서도 빳빳이 고개를 쳐들던 벼처럼 위풍당당했다. 그리고 빛났다! 
  악보를 읽어내고 가사를 연구하여 생각과 감정을 소리로 빚어내는 기술을 공부하고 훈련하기를 수도 없이 하고서야 비로소 나도 남도 즐길만한 소리, 음악이 되는 신비한 시간들을 난 경험했고 알아졌다. 골방 같은 연습실에서 스스로 재능을 발견하고 발표하고 발현되던 그 때 그 시절, 나의 성실과 타인의 칭찬은 내내 자긍심이었고 자랑이었다.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 걸었고 어디에서든지 누구에게든지 시선을 받는 일에 스스럼이 없었다. 바야흐로 보무당당한 시절이었다. 한 남자의 보호자로 살겠다는 결혼 서약 전까지. 
  하루 중 족히 서너 시간은 작물과 식물을 돕는 일, 대여섯 시간은 밥하고 밥 먹고 밥 주는 일이다. 하루의 적정 노동의 분량이 여덟 시간이라 하면 이미 노동의 총량은 족히 채워진다. 그 사이 틈틈이 그리고 내내 홍성사 경영자로 산다. 투입하는 직접 시간은 짧아보여도 집중과 긴장을 수반하는데 무엇보다 24시간 365일 책임감의 절대량은 어마무시하다. 매일 아침 두려운 심정을 동반한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위해서 저자와 독자들을 위해서 협력업체를 위해서다. 역사를 가진 출판사로서의 사회적 책임감도 적지 않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마을과 지역 주민과의 연합은 서서히 시간의 물리적 분량과 의지를 수반하는 심정적 에너지를 요청한다. 한들신문에 기고글을 쓰는 일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이제는 살을 부비고 살지 못하는 나의 네 아들들과 두 며느리 두 손주들을 위한 절절한 마음을 기도의 노동으로 변환하여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수고는 언제나 예외로 둘 수 없는 우주적 유일무이한 소명이다. 시절에 따라 시대의 소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주변 국가와 세계적 국제적 상황은 어떤지 현대문화의 핵심은 무엇으로 관통하는지... 어설프지만 두루 살피는 인류애까지. 한 남자와 결혼 서약을 하면서 전개된 보호자의 역할은 지난 수십 년간 심화 확장되어 어느덧 고개를 빳빳이 쳐들던 나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간데온데없다. 보호자는 때때로 악을 쓰고 용을 써도 실은 어리고 여린 내 사람들을 위해 그리할 뿐 스스로를 위해 그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단지 고개를 숙일 뿐이다. 무거워서. 버거워서.
  낙향한 지 4년이다. 이제 풀잎들이 저 각각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음을 알아 구별이 조금 된다. 하고 싶은 일을 뒤로하고 지금 해야 할 노동의 우선순위도 조금은 눈치챘다. 위기 대처가 된다는 것이다. 비와 바람과 눈과 해의 조화가 내 작물에 유무익함을 알아 피해가거나 무심하게 저들을 바라보고 기대하고 믿어주는 보호자임을 자처하니 이 점이 스스로 대견한 점이다. 
  오곡백과라 했나?! 실로 풍요로운 계절이다. 포도 사과 호두 밤 대추... 보호자들과 함께 징하게 일하고 이겨 견뎌낸 작물들의 목적,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열매로 쓰이기 위한 과실들의 한 해 살이가 마무리되는 계절이다. 여름 내내 고개를 빳빳이 들고 태양과 맞짱 뜨던 누런 벼들도 매일 고개를 자꾸자꾸 떨구더니 누군가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기 위해 베어지기를 고대하는 듯하다. 이렇게 한 해가 지나간다.
  내 인생 서사의 깊숙한 가을 진입으로 시시때때로 내게서 없어진 것들에 대한 연민이 스친다. 그중 제일이 소리고 노래다. 어찌어찌 보호자로 살기 시작하면서 걸러지고 멀어져서 이젠 소리를 잊었다. 노래와 멀어졌다. 노래를 반납하고 음악살기를 포기하고 살아낸 수십 년의 보호자살이가 열매를 거둘지 아직은 두고두고 관찰할 일이다. 서럽고 억울한 마음을 다스려 설득해 서랍에 넣으면서 포기 승복을 했던 절치부심의 결심과 수십 년 하루도 빠짐없는 이런저런 우격다짐 노동의 가을걷이는 어디쯤인걸까? 이 땅에 보호자의 소임을 마치게 될 그날 그 쉼은 언제쯤이고 어떠할까? 그날 그 쉼에는 책무와 채무 의무가 더 이상 없을까? 해피 엔딩일까? 새드 엔딩일까? 
  추수에 계절 훅 하고 치고 들어와 자리 잡은 감성의 늪에서 생각이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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