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그것으로 충분하다는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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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그것으로 충분하다는 확신
  • 한들신문
  • 승인 2023.05.08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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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빌라 생활재활교사 정진호

아침에 일어나 어젯밤 미처 치우지 못한 커피잔과 그릇을 설거지합니다. 창문 너머 벚나무가 눈에 들어옵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지 벚꽃잎이 회오리치듯 나풀나풀 솟구쳐 올랐다 떨어지네요. 그제야 아직 덜 피어서 초록인 줄 알았던 나무가 실은 잎을 다 떨어뜨린 후라는 걸 깨닫습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뛰어놉니다. 날이 따뜻합니다. 4월입니다.
  2023년 새해가 시작될 때, 어디론가 운전하며 모두를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요. 그리고 눈 떠보니 어느새 4월입니다. 봄이 되었어요. 돌이켜보니 감각할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매년 책을 만듭니다. 동료가 입주자를 도우며 땀과 눈물로 쓴 사회사업 기록을 엮고 편집합니다. 지난 일 년, 우리가 무엇을 보려 했고, 무엇을 바라 왔는지, 그 기쁨과 슬픔이 오롯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지난 연말과 연초를 그 일에 썼습니다. 글이 책이 되어 손에 쥐어지기까지 얼마쯤 조급한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지난 시간이 아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의미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나의 일, 우리 일의 의미를 스스로 확인하고 확신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었다고나 할까요?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생각마저 즐거웠습니다. 참 재미있었어요.
  그렇다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기만 한 건 아니었어요. 피곤해도 잠을 참아야 했고, 다른 일이 있으면 그 일을 끝낸 후에 이 일을 해야 했어요. 하고 싶은 일인데, 오늘은 넘어가고 싶은 날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일로 바쁘게 지내는 일상을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마음 나눌 수 있는 가까운 동료 몇 사람에게 묻기도 했고요. 여전히 분명한 답은 없지만, 그 과정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런 시간이었어요.
  한 사람은 아직 젊은 우리를 생각하면, 한창 바쁠 때가 아니겠냐고 했어요. 바빠야 하는 시기, 열심히 해야 하는 시절이지 않겠냐면서요.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명확히 정의하지 못했어도 오랫동안 견지해 온 생각과 같은 맥락에 속한 말이었어요. 시간이 지난 언젠가, 우리 일과와 일상 중에 일 말고도 중요한 것들이 늘어나면, 일만큼 사랑하는 것이 있고, 책임져야 하는 것이 생긴다면, 그때는 지금처럼 일할 수 없을 거예요. 경험 지혜 실력이 쌓여서 더 잘하게 될지는 몰라도, 지금처럼 온통 일에 시간을 쏟고 마음 다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평소 자유로워 보이는 동료였습니다. 그렇다고 일을 소홀히 하는 건 아니고, 해야 할 때는 누구 못지않게 마음을 다해서 해내지만, 일과 떨어진 시간에 속할 때는 일 이외에 다른 즐거움도 가진 사람이었어요. ‘일과 떨어진 시간’이라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지요. 그것도 좋아 보였습니다. 모든 일이 매번 술술 풀리지는 않으니, 어쩌다 수렁에 빠지는 날, 열심히 했지만 원하는 대로 나아가지 못한 것만 같은 기분이 압도하는 날이면, 그 사람이 생각났어요. 일이란 것이 마음과 의미를 다해도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일 밖의 무엇을 가져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주는 사람이었죠. 어떤 일이든 어느 하나가 너무 많은 범위를 차지해 버린다면, 그건 결코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 테니까요. 무언가 조금 흔들리기만 해도, 그게 곧 자신의 전부라면, 전부 흔들리고 마는 꼴이 되고 말 테니까요.
  돌고 돌아서 겨울을 지나고 봄이 성큼 다가오는 동안 바쁘게 보내는 일상과 일에 대해 종종, 꾸준히, 오랫동안 생각해 왔습니다. 결국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아서, 이 말에도 저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져서 누구의 말 하나로 내 생각이 말끔히 정리되지는 않았어요. 여전히 맞아떨어지는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이 사실 모두가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느끼고,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고, 답을 비교해 보는 일 가운데 비로소 변화와 발전, 성장이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연말과 연초, 바쁜 일이 한차례 몰아친 요즘은 바쁜 날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어요. 계획된 일정, 해야 할 일은 끝없는 파도처럼 이쪽으로 꾸준히 몰아치지만, 때가 되면 벌떡 일어나 과감히 뒤돌아섭니다.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손으로 툭툭 털어 내면서요. 내일도 바다에는 다시 나올 테고, 파도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마음 다해 마주하겠다는 결심을 품은 채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확신을 신뢰하면서요.
  바람에 벚꽃잎이 떨어져요. 날이 따뜻합니다. 아이들은 뛰어놀고요. 어느새 4월, 봄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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