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양민학살 억울한 죽음 뒤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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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양민학살 억울한 죽음 뒤처리
  • 한들신문
  • 승인 2021.04.0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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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운섭 전 거창사건유족회장

이 기고는 고 김운섭 전 거창사건유족회장이 거창사건 당시 겪은 경험을 책으로 만든 ‘거창양민학살 억울한 죽음 뒤처리’입니다. 한들신문은 당시 김 전 회장이 겪은 생생한 경험담을 기고로 옮기면서, 생동감을 전하기 위해 책에 사용된 표현까지 그대로 인용함을 알려드립니다.

▶ 차  례 ◀

학술토론회, 합동위령제 및 추모행사를 겸한 기공식(2)
가처분
일관성 없는 유족회
손해배상청구소송◀
반세기◀

회장의 사표
제50주기13회 합동위령제 및 추모식
거창사건 학술발표회

손해배상청구소송

2001217일 부산 법무법인 박준석 변호사를 선임하여 거창양민학살희생자위자료 및 유족에 대한 위로금 손해 배상 청구소송을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에 냈다.

 

원고: 문병현, 임호섭, 이철수, 문철주, 문충현, 서상도

피고: 대한민국 법률상 대표 법무부 장관 김정길

 

국가 공권력이 양민을 학살한 사건, 진주지원 황정은 판사는 받아들였다. 2001424일 현장검증을 한다는 것이다. 입법을 2000121일 이강두 의원 외 국회의원 30인의 서명으로 발의해놓은 상황에서 민사소송은 입법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총무인 내 개인 입장으로는 내키지 않았는데, 다수의 의견에 협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장검증이 있는 날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성명서를 채택하고, 거창 참여연대 한대수 사무국장에게 구호 선창을 부탁하여 유족을 비롯한 면민 백여 명이거창사건 해결하라- 해결하라-” 구호를 외치며 신원 복지회관 앞을 출발하여 박산묘역까지 가두행진을 하였는데, 거창경찰서 공권력이 긴장하여 전경을 요소에 배치하고 정보계 형사들이 감시를 하고, 행정에서는 군수를 비롯하여 관내 기관 단체에서 많이 참관하여 협조를 했다.

가두행진
가두행진
현장검증
현장검증

희생자를 기준으로 배우자나 자녀에 대한 위자료 1천만 원, 손자 형제자매 5백만 원을 인정한 판결이다. 피고 대한민국을 수행한 국방부에서 부산고법에 항소하므로 유족은 부대 항소를 하였다. 송사(訟事)는 청구금액에 따라 인지대 변호사 비용이 만만치 않아 1심에서 판결한 5천만 원을 3천만 원으로 3천만 원은 15백만 원으로 축소를 해야 하는 뼈를 깎는 아픔을 감내(堪耐) 해야 했다.

당초 민사소송을 낼 때 인지대 부담 때문에 청구금액 1억 원 미만은 인지대 부담이 적다 하여 409명이 각 20만 원씩 818십만 원을 청구하여 인지 대 40만 원을 냈다. 국방부에서 항소하므로 부산 박준석 변호사가 계산해 보낸 항소심에 대한 인지대는 희생자가 많은 유족에게는 장난이 아니다. 그러나 어려운 한경에도 유족들이 협조를 잘해줘 미 과세자를 제외한 유족들은 인지대를 납부했다.

고법 최종 판결을 남기고 유족회는 조성제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런데 1심에서 인정한 배우자 자녀 위자료 1천만 원을 7백만 원으로 손자 형제자매 위자료 5백만 원을 4백만 원으로 화해 권고가 들어와 승낙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법 재판장 판사 최진갑, 판사 윤택석, 판사 이홍구는 200429일 자로 위자료를 인정한다는 판결문을 만들어놓고 교체되었다. 교체된 재판장 판사 유인태, 판사 김규태, 판사 이정일 등이 200457일 기각을 시켜버렸다.

유족들은 또 학살의 망상(妄想)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송사비로 많게는 수백만 원을 냈는데 대법으로 가는 마지막 기회는 있기는 하나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반세기

양민학살 발생 반세기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는 20년이 넘었다. 글재주가 없어, 썼다 찢어버리기를 헤아릴 수가 없이 했다. 이제는 이대로나마 정리해야 할 것 같다. 2001321일 오전 10시 유난히도 추웠던 지난겨울이 서서히 봄의 문턱으로 다가서는데 신문과 텔레비전은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이 중앙병원에서 별세했다고 톱뉴스로 보도했다.

맥아더 장군이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했듯이 권력자도 금력자도 세월은 이기지 못해 사라져간다. 뚝심으로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등 대기업을 일구어온 기업가인데, 누가 인생무상이라 했는가? 건강을 자랑하던 그도 늙어지니 떠났다. 나도 나이가 어언 60이 되었다. 살날이 많이 남지는 않았다. 50년을 덤으로 살면서 사업이나 착실히 하여 가정이나 잘 꾸릴 것을...... 거창사건 명예 회복 하겠다고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는데 격려는커녕 비방하는 방해꾼만 생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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