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솔숲에 부는 바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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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솔숲에 부는 바람 1
  • 한들신문
  • 승인 2021.11.0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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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소설가)

어느 해 겨울, 여러 가지 일로 힘든 시간에 나는 문득 허난설헌(許蘭雪軒)이 태어난 집을 찾아가고 싶었다. 허난설헌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늘 나와 하나로 숨 쉬는 그 누군가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차표를 예매하고 대구로 향했다. 밤기차는 정동진을 향해 출발했다. 나는 일찌감치 눈을 감았지만 쉬 잠이 들지 않았다. 수많은 기억들이 짧은 시간 동안 기차 바퀴와 함께 농밀하게 흘러갔다.
  아베 코보의 소설 [모래의 여자]에,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해 헤매다가 모래 구멍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모래 구멍을 빠져나와야만 돌파구가 있을 것 같아 필사적으로 탈출해 보지만 여전히 그 밖이 다시 안이 되는, 삶의 모순을 보여준다. 나 역시 뫼비우스 띠 같은 그 모순의 고리를 맴돌다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모래구멍 밖을 향해 떠나려는 건지도 몰랐다.
  환호하는 주변 사람들의 외침에 눈을 떴다. 열차는 밤새 내륙을 거쳐 동해에 이르렀다. 바다는 아직 검게 출렁이고 있었다. 나는 새벽을 밝히는 눈빛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허난설헌 생가로 가는 길의 솔숲은 고즈넉하고 소담스러웠다. 숲은 자궁처럼 그녀의 집을 싸안고 있었다. 바람 따라 그윽한 솔 향이 골목길에 가득했다. 
  허난설헌 생가는 조선시대 문신, 초당 허엽의 집으로 난설헌이 태어난 집이다. 앞에는 행랑채가 있고 마당을 사이에 두고 입 구(口)자형의 본채가 있다. 본채는 두 대문을 사이에 두어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고 그 사이에는 광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나에게 그 집은 전통가옥으로서의 미학적 가치나 구조적 의미보다, 여성에게 가장 폐쇄적이고 억압적이었던 봉건적 가부장제 속에서 질식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한 여성, 허난설헌의 삶의 흔적이 더 중요했다. 

  허난설헌은 1563년(명종 18년) 강릉에서 태어나, 1589년(선조 22년) 3월 19일 27세로 사망했다. 이름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이다. 그녀가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으로, 사화와 세력다툼으로 혼란스러웠다. 아버지 허엽은 경상 감사를 역임했고 동서분당 때 동인의 영수로, 난설헌이 18세 때 상주에서 객사했다.
  큰오빠 허성은 이조ㆍ병조판서까지 지냈고, 작은오빠 허봉은 홍문관 전한을 지냈다. 허봉은 강직한 성격으로 임금에게 직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가 귀양 갔다. 3년 후 방면되지만 불우하게 지내다 객사했다. 동생 허균(許筠)은 난설헌보다 여섯 살 아래로 호는 교산(蛟山)이고 형조ㆍ예조 판서까지 지냈다. 아주 총명하고 지식에 막힘이 없었으며 개혁의식이 뚜렷했다. 봉건사회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은 소설 [홍길동전]의 작가로서 50세에 역모죄로 처형당했다. 가족은 모두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기질을 갖고 있었으며 문장에 뛰어나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허 씨 5문장(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이라고 불렀다. 
  난설헌은 이런 환경에서 일찍부터 글을 깨우쳤고 도교의 신선세계에 대해 배웠다. 8세에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을 지어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특히 태평광기(중국 송나라 학자 이방 등이 편찬한 설화집으로 신선, 도술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를 즐겨 읽었다.   
  허난설헌의 시는 당시(唐詩)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지닌다. 허엽이 화담 서경덕의 제자로, 난설헌이 도교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는 데 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작은오빠 봉은 난설헌보다 12세 위로, 충분히 그녀를 가르쳐 줄 위치에 있었으며 동생의 재능을 아꼈다. 봉은 자기의 글벗인 손곡 이달에게 글을 배우게 했다. 이달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지만 서얼이기 때문에 벼슬길에 나갈 수가 없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틀에 박히지 않는 글을 썼다. 난설헌은 그런 이달에게서 자유분방한 문학성을 배웠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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