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아름다운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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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아름다운 피아노
  • 한들신문
  • 승인 2021.12.28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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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소설가)
삽화 : 김녹촌
삽화 : 김녹촌

 

우리 가족에게는 아름다운 피아노가 한 대 있다. 
  우리는 그 피아노를 중심으로, 노래하고 연주도 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우리 형제들이, 그리고 나의 아들과 조카들이 그것으로 피아노 연주를 익혔다. 
  우리 집안에 들어온 후 삼십여 년이 넘어갔으니, 그 피아노의 실제 나이는 그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견디느라, 검은색 포마이카 칠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한쪽 페달도 주저앉곤 했다. 하얀 껍질을 몇 번씩이나 부쳤다 뗐다 한 건반들도 많았다. 나중에 어느 시골교회의 찬양 연습용이 되었던 그 피아노는 지금쯤은 폐기되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에도 자식들 가슴에 아름다운 선율을 담아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수없이 망설이면서 애써 장만한 삼백여 평의 남새밭을 파셨다. 그리고 그 피아노를 사셨다. 그때는 밭 값이 피아노 값과 같았다. 그 피아노는 옛날 것이라, 마치 자기 존재의 의미를 과시하듯 무게가 엄청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곁에 온 그 피아노 덕분에, 우리는 음악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고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피아노로 예민해진 귀는, 사물들 속에 그들만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선율을 느끼고 귀 기울일 수 있게 했고, 또한 눈부신 빛깔에 눈 뜨고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자신은 가난하게 사셨지만 그러나 가장 풍요로운 유산을 남긴 것이다. 지금도 아버지의 피아노는 우리의 가슴속에 삶 속에 아름다운 음악으로 다채로운 그림으로 풍성한 글로 되살아나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혼자서 신산한 세월을 견디며 자식들을 돌봐야 했다. 삶의 질곡 앞에 설 때마다, 남의 땅이 돼 버린, 그리고 지금은 피아노 수백 대도 더 살 수 있는 그 밭을 돌아보셨을 것이다. 그러나 크게 후회한 일은 없으셨단다.

  얼마 전, 어릴 적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죽음이 그리 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오래전에 써둔 나의 유언을 꺼내보았다. 쥐꼬리만 한 퇴직금에 삶 전체를 매단 것처럼 그것을 이리저리 쪼개고 나누었던 어리석은 나 자신을 만났다. 진정 가치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몇 푼어치 되지 않는 삶의 찌꺼기에 얽매인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부끄러움에 그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어느덧 나도 예순을 넘었다. 이제 살아온 나날보다 남은 날이 더 짧을 것이다.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내며 무엇을 남길 수 있나 생각해 본다. 
  그동안의 삶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를 얽어매는 갖가지 부자유와 구속에서 벗어난, 참다운 진리가 주는 자유와 진정한 행복을 찾아 떠나고 싶다. 아버지처럼 나를 붙들어 매는 밭을 팔아서 꿈의 선율을 살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사고 싶다. 그리하여 내가 떠난 자리가 아름다운 빈자리였으면 좋겠다. 
  그러나 기어이 욕심을 낸다면, 나도 아버지가 남겨준 피아노 한 대 정도는 갖고 싶다. 그래서 살아남은 자들이 내가 남긴 피아노로 아름다운 선율을 즐기고 내밀한 소리에 귀 기울이며 찬란한 별을 꿈꿀 수 있다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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