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학교 이야기46] 차를 드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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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학교 이야기46] 차를 드시지요
  • 한들신문
  • 승인 2022.10.04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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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초등학교 돌봄전담사 이수연

 

아이들이 오기 전에 서둘러 무릇 한 줌을 병에 꽂는다. 점심때 길가에서 보고 반가워 몇 줄기 뽑아왔다. 무릇은 자주색 꽃잎들이 합창하듯 모여 노루 꼬리만 한 꽃 망태기를 늘어뜨린 꽃이다. 창가에 놓으니 네모의 창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유연하고 곧은 무릇 줄기로 복조리를 엮어 놀던 유년의 기억이 이만 오천 개 겹눈의 창으로 들어온다.
  초가을 햇살을 무거운 눈썹 위에 얹은 아이들이 돌봄교실로 온다. 무릇을 발견한 아이가 놓치지 않고 말한다.
“오늘 차 마실 거죠?”
“차 마시고 싶어?”
“다화가 있는데 당연히 마셔야죠.”
“다식 없는데 어쩌지?”
“차만 마셔도 돼요”
  황차가 좋겠다. 편히 쉬게 도와주는 차니까. 물을 끓인다. 물이 끓는 동안 아이들이 다구를 차린다. 제법 능숙하게 다포를 깔고 숙우, 다관, 차받침, 찻잔, 퇴수기를 순서대로 놓는다. 때맞춰 자작나무 발걸음으로 느릿느릿 피아노 선율이 흐른다. 아이들은 천천히 호흡하며 마음을 배꼽 아래로 가져간다. 
  첫 다도 수업이 생각난다. 3월 10일, 오후 2시였다. 아이들은 새 학년이 되어서 환경에 적응하느라 마음이 머리 꼭대기에 떠 있는 상태였다. 처음 오신 다도 선생님께서 녹차를 우리셨다. 그 사이를 못 견디고 한 아이가 앞에 놓인 도자기 찻잔을 구슬처럼 굴려 책상 밑으로 깨뜨렸다. 깨진 찻잔은 날카로웠다. 마음이 붕 떠다녀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첫 녹차의 맛은 혼란스러웠다.
“아무 맛도 안 나요.”
“아이 써! 쓴맛만 나요.”
“뭔가 썩은 맛이에요.”
  아이들은 한 모금 마시고 한 마디씩 하고 찻잔을 밀어냈다. 
  일주일 후, 다음 수업에는 녹차, 청차, 황차, 백차, 흑차가 유리 다관에 담겨 나란히 놓였다. 차례로 마른 찻잎의 향기를 맡아보았다. 
“이게 무슨 냄새지?” 
  이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달콤한 꽃 냄새도 아닌 고소한 과자 냄새도 아닌 퀴퀴한 곰팡내도 아닌 이런 냄새는 처음 맡아본다. 이런 냄새의 언어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모르는 냄새예요.”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요.”
  찻잎도 만져보게 했다. 하지만 검게 말라비틀어진 풀 같은 것에 도무지 흥미가 일지 않는지 아이들은 미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호기심 많고 눈 밝은 아이 하나가 나서서 
“홍차는 깎아놓은 손톱 만지는 것 같고요. 청차는 동글해서 단추 같고요. 백차는 털옷을 입고 있어요.” 했을 뿐이었다.
  다도 선생님께서는 잠자코 다섯 개의 다관에 더운물을 따르셨다. 그 순간 요술이 시작되었다. 거무튀튀하게 죽어 있던 찻잎들이 웅덩이 속 장구벌레처럼 살아났던 것이다. 그것도 영롱한 다섯 가지 색으로 말이다. 엷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불그스름하고 노르스름하고 푸르스름하고 거무스름하고 맑고 고요한 색깔 물이 마치 목대 긴 백일홍처럼 아련히 피어올랐다.
“우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으므로 요술은 완성되었다. 
  봄이 되자 학교 뒷동산에 풀꽃들이 피어났다. 냉이꽃, 고들빼기꽃, 뽀리뱅이꽃, 꽃다지꽃……. 다도 수업이 있을 때면 풀꽃 두어 줄기를 꺾어서 빈 요구르트 병에 꽂아 찻자리에 놓았다. 다화였다. 다화는 계절에 피는 청초하고 소박한 꽃을 간소하게 꽂아 찻자리의 절제미를 표현한다. 다화를 꽂으면서 아이들은 창을 하나씩 갖게 되었다. 
  그 창은 풀꽃만 보이는 창이다. 봄이 깊어지면서 지칭개가 피고 패랭이, 개망초가 피어나 창으로 들어왔다. 여름의 문턱에서 엉겅퀴, 끈끈이대나물꽃, 달개비가 차례로 창을 노크했다. 아이들은 다화가 놓인 자신의 찻자리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꽃의 빛깔과 향기에 따라서 차 맛도 달라지는 듯했다. 
  차는 소화기관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소화를 도와 쉬이 배고프게 하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간단한 간식인 다식을 차에 곁들이기도 했다. 다식은 밤이나 말린 과일, 깨, 콩 등 자연 식재료로 만든 과자를 내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이래저래 형편이 맞지 않아 두부 과자, 쌀 과자 등 곡물 과자로 대신했다. 종지에 다식을 내니 찻잔 비워지는 횟수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늘었다.
  찻자리에서는 아이들이 쥐기에도 편한 작은 다관과 찻잔을 주로 쓴다. 왜 그럴까? 
  쉬기 위해서이다. 한 잔 우려내고 쉬고 한 잔 따라내고 쉬고 한 잔 데워내고 쉰다. 한 잔 마시며 쉬고 또 쉰다. 쉬는 동안 호흡이 고르고 오감이 열린다. 열린 오감은 시간과 공간의 작용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게 된다. 또르르 찻잔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메아리처럼 웅숭깊게 들린다. 이슬처럼 맺히는 차 맛을 혀로 굴려본다. 차 향기가 무겁게 혹은 가볍게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지켜본다.
  황차가 우러났다. 각도를 낮춘 볕이 유리 다관에 정면으로 부딪친다. 금빛 가을이 찬란하게 부서진다. 
  차를 따른다. 
“톡! 또르르!”
  순간 창밖에 도토리가 떨어졌다. 간지럽겠다. 도토리 웃음이 찻잔에 담긴다.  
“차를 드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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