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우리가 머무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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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우리가 머무는 공간
  • 한들신문
  • 승인 2022.10.3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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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빌라 생활재활교사 정진호

‘공간은 우리 마음과 정신의 현현이다. 일상성이 가진 위대한 힘이 우리가 머무는 공간에서 시작되는 이유다. (23쪽)’ - <오늘도 계속 삽니다>, 김교석

언젠가 읽은 책에서 공간을 두고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과 정신의 현현’, 처음 읽었을 때는 어쩐지 거창하고 장황한 것 같았지만, 무엇을 말하는지 곧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어떤 공간에 위치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우리 자신과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말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일상성이 가진 위대한 힘이 우리가 머무는 공간에서 시작되는 이유’, 마음에 새기듯 소리 내어 천천히 읽어 봅니다.
  이번에도 역시 함께 글을 쓰는 동료가 좋은 주제를 제안해 주었습니다. ‘거창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 대해 쓰기로 했습니다. 주제를 생각하니 자연스레 이 책이 떠올랐고요. 나의 일상에 영향을 주는, 자주 머무는, 좋아서 자주 가는 장소, 무엇을 써야 할지 잘 알겠습니다.

1. 감악산
  머릿속 전구에 불이 켜지듯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세 곳을 두고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처음은 감악산입니다. 감악산 유명하죠. 요즘은 축제를 한다던데, 오가는 인파로 북적북적한 것 같습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한적한 평소도 좋고, 때마다 시기마다 북적북적 사람으로 가득한 특별한 날도 좋습니다.
  감악산에 처음 가게 된 건 거창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지금 일하는 직장에서 실습생으로 참여하던 때였는데, 깜깜한 밤, 선생님을 따라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과 감악산으로 향했습니다. 자동차로 산길을 올라왔을 뿐인데 갑자기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만 같았습니다. 사방이 깜깜한 들판, 머리 위에서 별이 반짝이고, 저 멀리 거창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풍력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마저 새롭고 특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그랬지요. 또 이전으로 거슬러 가 언젠가, 선생님이 동료와 이곳에 서서 저 야경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고요. 우리가 지원하는 분들과 저기 보이는 거창 곳곳을 발바닥 닳도록 다녀보자고요. 저마다 어려운 상황이 있어도, 그래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시도록, 그래도 사람들과 어울려 사시도록 도우려는 우리 뜻에 꼭 맞는 말이었습니다. 일을 하다 힘들 때, 그때 그 말과 풍경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일어납니다.


2. 거창시외버스터미널 건너편 강변
  연고가 없던 거창이라는 곳에 살겠다고 와서 처음 내린 곳이 이곳 거창시외버스터미널이었습니다. 경험해 보지 못한 모르는 곳에 왔으니 떨리고 설레고 막막한 마음으로 버스에서 내려 터미널 밖으로 나왔습니다. 바로 앞 강물이 보였고, 무언가 탁 트였던 인상이 남아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앞으로 저 눈앞에 보이는 강 앞에 자주 앉아 있을 거라는 걸요.
  터미널 건너편에 있는 주공아파트에 오래 살았습니다. 집에서 나오면 바로 앞이 강변이니 매일 지나가고 자주 산책했습니다. 하루하루 의미 있게 보내려 애쓰며 사람들과 웃으며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가족도 친구도 없는 빈집의 고요가 힘들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강변으로 나왔습니다. 걸을 수 있는 데까지 걸었다 돌아오기도 하고, 멈추고 싶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좋아하는 노래를 듣다가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제가 가장 자주 앉아 있었던 곳이 터미널 강 건너편이었습니다.
  어쩐지 터미널을 보고 있으면 일렁이는 마음이 괜찮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당장 길을 건너서 버스를 타고 떠나야겠다’는 결심은 아니었는데요. 그냥 멀리서 저기를 보고 있으면, 처음 내가 버스에서 내려서 저 땅을 밟았던 날이 생각났습니다. 그 다짐과 결심, 아무것도 모르지만 무엇이든 해내겠다는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기분이었습니다.
  거창시외버스터미널 건너편 강변,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안식처 같은 장소가 되었습니다.

3. 서덕공원
  마지막으로 글에 담는 장소는 위천면에 있는 서덕공원입니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인데, 어떤 사람 덕분에 처음 가 보게 되었습니다. 이곳도 다른 세상이더군요. 평범하고 익숙한 논과 밭 사이 불쑥 나타난 정자와 공원이 참 좋습니다. 가만히 앉아 탁 트인 풍경 속에 있으면 어떤 고민도 훌훌 날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무한히 풍부하고, 위대한 예술가를 창조하는 것은 오로지 자연뿐이다. (24쪽)’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

  그곳에서 읽었던 아름다운 책의 한 문장이 떠오릅니다. 오늘 저는 어디에 있을까요? 내일은 어디로 갈까요? 누구와 함께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말하게 될까요? 알 수 없어서 막막하고, 동시에 그래서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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