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㉛ 1946년 신탁통치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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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㉛ 1946년 신탁통치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
  • 한들신문
  • 승인 2022.12.2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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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 등 우익단체의 등장과 10월 항쟁-

1945년 12월 전국적으로 전개된 신탁통치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이 거창지역에서도 재현되었고, 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과 함께 1946년부터 거창에서는 민족진영의 우익단체들이 등장하였다.

  거창지역은 인민위원회, 농민조합, 청년동맹 등의 진보적 사회단체들이 1946년 이후 미군정의 탄압으로 약화되자, 1946년 2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신탁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위원회가 통합하여 발족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1948년 10월 여순 사건 발생 후 국민회로 재조직되었고 이후 1949년 6월 9일 ‘거창국민회’로 재결성되었다.
  
  1946년 4월 1일과 3일 대한독립 촉성 국민회 지방 순회 강연대의 강연이 거창읍과 가조면에서 개최되었다. 1948년 이전까지 독립 촉성 국민회의 활동은 미약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독립 촉성 국민회 거창 지부 간부를 지낸 표현태가 국민회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표현태는 일제 강점기에 거창군 월천면 면협 의원과 월천면장을 지냈다. 해방 후 1946년 2월부터 11월까지 다시 월천면장을 지냈다. 조선민족청년단 거창군 단부 단장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거창지부 간부로 활약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지역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국민회의 활동은 강화되었다. 1949년 6월 9일 거창 국민회 결성식에 거창 군민과 임원들이 참석하여 국민운동 강화 방침을 토의하고 지부장에 신중목, 부지부장에 한진권, 최영숙, 전경현을 선출하였다. 1949년 10월 10일 국민회 경상남도 대회에서 거창 국민회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거창 국민회 지부장 신중목이 임시 집행 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대회를 진행하였고, 경상남도 본부 위원장 선거에서 신중목이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신중목은 일제강점기 거창군 서기, 거창읍 협의원을 지냈고, 해방 후 1945년 10월 미군정으로부터 거창 군수에 임명되었다. 1946년 11월에는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 경상남도 의원 선거에서 거창, 함양, 산청, 합천, 창녕, 의령을 포함하는 제5구에 출마해 당선되어, 운수 체신 분과 위원과 특별 위원부 행정 조직부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5월 10일 거창 지역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독립촉성국민회 선거후원회의 추천을 받고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46년 가을부터 미군정의 양곡 배급 정책의 실패에 맞서기 위해 대구에서 일어난 민중 항쟁이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를 비롯하여 전국으로 확산된 사건이 일어났다.
 
  1946년 4월의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 계통 정당, 사회단체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과 함께 조선공산당은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이후 정판사 사건[1946년 5월 조선공산당이 일으킨 지폐 위조 사건] 등으로 미군정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이에 대응하여 공산당에서는 7월에 이른바 ‘신전술’을 채택하였다. 이후 좌익은 전국적인 규모에서 반미 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후 좌우익 간의 각종 테러 사건, 총파업 사건, 폭동 사건 등이 잇따라 야기되었다. 1946년 9월 4일 조선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의 3당 합당을 결정하여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발된 이른바 10월 항쟁은 10월 3일부터 경상남도로 파급되었으며, 진주와 마산에서 가장 심한 폭력이 행해졌다. 

  통영군에서 대규모 군중 투쟁이 발생하는 등 항쟁이 경상남도 전 지역으로 확산되자 경상남도 군정은 적극적인 진압에 나섰다. 10월 5일 일체의 시위와 집회를 금지한다고 발표하고 8일부터는 학생들에게 임시 휴교령을 내렸다. 미군과 경찰이 군중들의 투쟁에 대비하여 폭동 예비 혐의로 농민들을 구금하거나 마을마다 가폭동 진압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항쟁이 발생하면 철저히 물리력으로 진압하였다. 

  경남 거창군은 미군과 경찰이 치안유지를 위해 병력을 동원하여 물리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거창 인근 지역에서 투쟁이 격렬해짐에 따라 미군과 경찰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우익 세력, 특히 우익 계열의 청년들이 진압에 적극 동원되었다. 이들은 항쟁 관련자를 체포하는 데 협력한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을 불법적으로 체포하거나 테러를 자행하였다.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 참고문헌

조재원, 『거창의 지역사회 변동과 민족운동』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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