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㉙ 1945년 해방과 거칭인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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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㉙ 1945년 해방과 거칭인민위원회
  • 한들신문
  • 승인 2022.10.31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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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인민위원회의 자주적 건국운동-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일본이 패전하자 바로 미군과 소련군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은 해방과 더불어 미소의 군정을 종식시키고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 과제의 실현에 앞장선 것은 여운형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이다.
  건국준비위원회는 당면 목표를 치안의 확보, 건국 사업을 위한 민족역량의 일원화, 교통·통신·금융 대책 및 식량 대책에 두고, 좌우익 인사를 고루 포섭하면서 중앙정부 역할을 담당할 행정기구를 갖추어 갔고, 청년·학생 2천여 명으로 건국 치안대를 조직하였다. 
  또한 각 지방의 지부 조직을 적극적으로 확대하여 8월 말이 되면서 북의 회령에서 남의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중용한 시·군 대부분에 건국준비위원회 지부 성격의 자치 조직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건국준비위원회가 주도했던 독립국가 건설운동은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진주하면서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된다. 
  미군정은 해방 후 한국인이 자주적으로 추진해 온 건국운동을 전부 부정하고, 지역별 위원회와 치안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서부 경남 지역은 미군 40사단 58, 70중대(300명 규모)가 10월 2일 진주에 본부를 두고 합천, 남해, 사천, 하동, 진양, 산청, 함양, 거창군 총 8개 시군을 관할하고 있었다. 
  미군의 실제 업무는 11월 1일부터 “법과 질서 유지, 식량과 연료 문제, 일본인 재산 처리, 인플레 상태 해결, 공산주의 동조들의 활동을 감시”하는 것이다. 
  이들은 조선인들을 일본과 동일하게 “적국민”이라고 인식했다. 하지만 ‘점령군’ 미군은 건준을 비롯한 조선인들의 독자적인 조직보다 “훈련된 일본인 관료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제거할 수도 없다.”라고 민중들의 염원과 다른 점령 정책을 펼쳤다. 
  결국 미군정의 점령 정책은 거창 내의 일반 군민들의 의지와 다르게 이어져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경남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 지부가 개편된 군·면 단위의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주적 건국운동이 계속되었다. 
  1945년 10월 5일 경상남도 인민위원회 결성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경상남도 지부가 경상남도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경상남도 20개 군에서 결성된 인민위원회는 행정기관 접수, 치안 유지 활동, 세금 징수, 인구 조사 등과 같이 사실상의 정부와도 같은 광범한 통제력을 가졌다. 
 
  거창인민위원회는 부산, 마산 등 경상남도의 주요 지역 인민위원회가 결성되는 10월 중순부터 11월 20일 사이에 결성되었고, 주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행정권을 장악하고 사실상의 주민 자치 기관으로서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당시 거창인민위원회 위원장은 신학업이었다. 신학업의 지도 아래 1945년 말에서 1946년 초에 걸쳐 산하에 거창농민조합, 거창읍청년동맹, 부녀동맹 등이 조직되었다. 

  1945년 11월 20~23일 서울 천도교 강당에서 개최된 전국인민 대표자 대회에 거창 대표로 참여한 인물은 신학우와 함일호였다. 고령 신씨 대동보에 ‘정은공파 24세 우(雨)항렬로 족보명은 신학우(申學雨)이고 학업(學業)이 그의 자(字)’라고 되어 있는데 신학우는 신학업과 동일인일 수도 있다. 

  거창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한 신학업은 1917년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일본으로 가 1919년 3월 일본 게이오대학 상과 야학부에 재학하던 중, 3·1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을 당하였다. 
  같은 해 10월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접촉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경남 울산군 언양면에서 농민조합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로 인해 신학업은 소위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28년 9월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을 받았다.

  1931년 7월경에는 양산군 상서면에서 최해봉 등과 함께 권대형을 만나 적색농민조합 경남동부위원회를 결성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신학업은 이와 같이 활동하다 다시 체포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33년 5월 징역 2년을 받았다.

  1946년 2월 7일 민주주의 민족전선 경남도 위원회 결성 준비 위원회에 거창인민위원회를 대표하여 우한욱이 준비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하지만 1946년 6월 4일 거창 인민위원장 신학업 등 39명이 미군정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거창 인민 위원회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 참고문헌
1. 조재원, 『거창의 지역사회 변동과 민족운동』 (2020) 
2. 국가보훈처 www.mpva.go.kr/ 독립유공자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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