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㉘ 해외 독립운동과 거창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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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㉘ 해외 독립운동과 거창인들
  • 한들신문
  • 승인 2022.10.0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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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40년대 중국에서의 항일무장투쟁-

1920년대 대공황에 시달리던 일제는 그 타개책으로 1930년대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대륙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다. 또한, 1941년 일제가 미국의 진주만을 선전 포고도 없이 불법적으로 기습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조선에서는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이른바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한국인 노동력이 착취되었고, 학도 지원병, 징병제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또,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으며, 그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의 명목 아래 성노예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편 침체되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 활동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인 애국단의 활약으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애국단의 일원이었던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도 끌어내 후에 중일전쟁 이후에 창설된 한국 광복군의 발판이 될 수 있었다.

  30년대의 독립운동의 중심점은 김원봉과 김규식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이었다. 이후 김원봉과 김규식, 그리고 민족혁명당 산하의 조선의용대 일부 세력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였다.

  만주지역에 자유시 참변과 미쓰야 협정으로 사실상 중단된 무장 독립 투쟁 노선도 1930년대 초반부터 한중 연합작전을 전개해 다시 재개되었다. 그러나 만주침략이 본격화된, 만주국 수립 이후에는 만주에서의 무장 투쟁이 힘들어지자, 지청천과 같은 혁신의회 계열의 한국독립군 인사들은 임정의 요청을 받고 중국 관내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여건 속에서도 만주에서는 한중 연합작전을 넘어선 한중 연합부대인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중일 전쟁 이후 중국 관내에서는 많은 항일 무장 부대가 편성되기 시작하였다. 김원봉과 김규식, 지청천, 조소앙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 산하의 조선의용대와,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 김두봉 등이 주도한 조선독립동맹 산하의 조선의용군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 인사들이 충칭의 임시정부로 합류하자, 당 산하의 조선의용대의 다수의 세력은 화북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하였다. 그 후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고 독립동맹의 산하 군조직으로 편성되었다.

  1930~4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현장에는 다수의 거창인이 참여하였고,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 김원봉의 조선의열단,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거창 출신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한 인물은 신종섭과 신병항, 신성, 정병근, 장부희 등이 있다.

  신종섭은 일본 메이지대학에 재학 중 최팔용, 백관수 등을 만나 1919년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 선언에 가담하였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건너갔다. 1919년 4월 유하현에서 이탁 등이 조직한 한족회에 가입하여 그 사법기관인 상법과장에 임명되어 항일투쟁을 하였다. 1920년 일본군이 오래 전부터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어 오던 유하현 삼원보를 습격, 가가호호를 가택 수색하고 교포 부녀자를 구타하며 소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남자 300여 명을 포박, 갖은 악형과 고문을 가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귀순을 종용 받았으나, 끝내 거부하고 피살 순국하였다.

  신병항은 1927년경부터 신간회 거창지회 간부와 거창청년동맹 조직부장으로 선임되어 민족통일전선 및 민족운동을 위해 활동하다가 국내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데 한계를 느끼던 중, 김원봉의 처남 박문희의 권유를 받고 김영배 등과 함께 1932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1932년 김원봉이 의열단의 독자적인 항일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자, 동년 10월 윤세주 등과 함께 제1기생으로 입교하여 정치학·폭탄 제조법·사격 교련·기관총조 종법 등을 수련한 뒤 1933년 4월 간부학교를 수료하였다. 
  혁명군사학교를 졸업하자 김원봉과 개별 면담 후 의열단 지도부의 방침에 따라 이육사 등과 함께 차기 군관학교 입교생 모집, 국내의 농민·노동자의 민족의식 고취, 혁명사상의 조성, 국내정세 보고 등의 밀명을 띠고 1934년 12월경 귀국하기 위해 상해 일본총영사관에 거주증명을 제출하였다가 신분이 발견되어 피체되었다.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 뒤 1935년 1월 본국으로 압송된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6년 10월경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신성은 1932년 여름 상하이에서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담했다. 1934년 12월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35년 4월 졸업했다. 곧이어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3기에 입학하여 9월 졸업했다. 그 후 조선민족혁명당 특무부원으로 활동했다. 1936년 7월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던 중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의용대에 참여하여 한때 중국군 제5전구에서 활동했다. 곧 제5전구를 이탈하여 연안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항일군정대학 제5기에 입학하여 1940년까지 수학했다. 
  그 후 팔로군 지난 근거지와 태항산 근거지에서 1944년 4월까지 활동했다. 선양에서 해방을 맞은 신성은 1945년 8월 18일 현지의 조선인 청년들을 모아 조선의용군 독립지대를 창건하고 지대장에 취임하였다. 그 후 중국 관내에서 파견된 조선의용군 선견대와 합쳐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를 결성하고 대장이 되었다. 선견 종대원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한때 진출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반대에 부딪혀 선양으로 되돌아가, 조선의용군 독립 대대장에 임명되었다. 

  정병근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12월 만주 길림성 일본총영사가 일본 내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에 의하면 정병근은 1919년 독립운동단체인 한족회중앙총회 길남한족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남일강습소를 세우고 청년들에게 무기사용, 부대활동 등 군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21년 12월 독립군과 국내로 진공하여 활동 중, 12월 12월 함경남도 단천군 수하면 황곡리에서 일본경찰과 전투 끝에 피살 순국하였다.

  장부희는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1944년 1월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학하여 1945년 2월 간부훈련반을 수료하였으나 중국에서 실종되었다.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 참고문헌
1. 김영석, 『거창의 독립운동 자료집』, 거창문화원 (2019)
2. 조재원, 『거창의 지역사회 변동과 민족운동』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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