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㉚ 1945년 미군정의 실시와 거창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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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㉚ 1945년 미군정의 실시와 거창사회
  • 한들신문
  • 승인 2022.11.3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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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거창점령과 신탁통치 반대운동-

미군은 10월 9일 전후에 거창을 점령했다. 특히 미군은 본부(진주)와 지역적으로 떨어진 거창 등지에 순찰차를 배치하고 소규모 인원의 미군을 배치했다. 그리고 일제의 경찰이었던 장자관을 거창경찰서장에, 지역 유지로 거창군청 관료 출신 신중목을 거창군수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거창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이 임명한 장자관 거창경찰서장과 신중목 거창군수와는 별도로 거창경찰서장과 경찰을 임명하였다. 거창 군민들은 일제강점기 때 기독교 민족주의자로서는 드물게 거창 유지 반열에 올랐고, 해방 후 좌우익 양측으로부터 광범위한 신뢰와 지지를 받은 주남재를 초대 민선 거창 군수로 선출하였다.

  초대 민선 거창군수 주남재[1878~1958]는 조선일보 거창지국의 기자, 지국장을 지내면서 활발한 지역 운동을 전개했다. 동시에 거창읍 교회에 출석하는 기독교인이었다. 1920년대 이후에는 거창의 청년운동에 주력하였다. 1920년 거창청년회를 창립하고, 300여 명의 회원과 2만여 원의 자금을 모집하여 계몽 강연회, 재외 동포 돕기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거창청년회는 거창시민대운동회를 개최하고, 청년독서회를 열었으며, 공창·흡연·아편 폐지 운동, 연극 공연, 음악회 개최, 도서관 개설 등의 운동을 벌였다. 주남재는 1925년 거창청년회관에서 무산아동을 위한 보성학원을 열고 80여 명의 학생들에게 보통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1920년대 후반 신간회 거창지회의 주축 인물이었다. 1927년 10월 22일 신간회 거창지회가 창립될 때 임시의장이었고, 창립 후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좌우합작, 민족유일당 운동에 앞장섰다. 거창군민들은 또한 신간회 임원을 지낸 황창석을 거창경찰서장으로 뽑아 행정과 치안 유지 임무를 맡겼다.

  이 시기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미국·영국·소련 삼국의 외교장관들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한 회의를 열고 한반도 문제에 대한 처리 방침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삼상회의 결정 안은 독립 보장과 임시 민주정부 수립에 대한 내용을 생략한 채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으로 국내에 보도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삼상 결정 안을 둘러싸고 남에서는 이를 신탁통치로 규정하고 반대하는 세력과 이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열이 일어나 격렬한 대립이 벌어졌다.

  1945년 12월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의 거창지역 농민운동 조직으로 거창농민조합이 결성되었다. 1945년 12월 8일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에 거창군 대의원으로 정중호, 최석만, 신우철이 참가하였다. 신우철은 1931년 5월 거창청년동맹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거창 지역의 농민 조합 활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47년 7월 21일에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경상남도 농민조합총연맹 제2차 대표자 대회가 거창에서 열렸다. 거창인민위원회 대표 신학우가 개회사를 하고 집행위원 5명을 선출한 다음 미소공동위원회에 보내는 메시지와 요구 조건을 제시하였다.

  거창읍 청년동맹은 1945년 12월에 결성된 전 조선청년총동맹의 거창읍 지부로 거창지역 청년과 청년조직들을 총망라하여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 건설과 봉건적 요소 및 반동 세력의 철저한 숙청, 청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지위 향상을 꾀하는 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되어 미군정의 탄압을 받으며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2월 10일 거창읍 청년동맹 제1회 총회가 열렸다. 회원 750명, 내빈 50여 명이 참석하였다. 위원장에 신양재, 부위원장 이영구, 연락부장 우한운, 조직부장 정삼창, 선전부장 김종호, 체육부장 김학이 선출되었다. 거창읍 청년동맹 신양재는 1933년 7월 거창농민조합 사건으로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를 적용받아 징역 1년 3개월 형을 언도받은 인물이었다. 청년동맹원 김형찬 외 3인은 ‘적기가’를 부르는 등 사회주의 성향의 활동 모습을 보였다. 

  1946년 4월 14일 미군정은 주남재 거창군수와 황창석 거창경찰서장을 파면시키고, 친일 관료 경력을 가진 정순종을 거창군수로, 일제 고등계 경찰 정정옥을 거창경찰서장으로 다시 임명하였다. 1946년 4월 15일에는 미군정 경관 5~6명이 출동하여 거창인민위원회와 거창농민조합, 거창청년동맹 사무실을 수색하고 문서 일체를 압수하였다. 거창인민위원회가 임명했던 경찰도 미군정 군대가 출동하여 체포하였다. 

  1946년 6월 4일 거창인민위원장 신학업 등 39명이 미군정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거창인민위원회와 거창 농민조합, 거창읍 청년동맹은 조직에 타격을 받아 활동이 약화되었다.

  거창인민위원회는 해방 후 거창을 대표하는 새로운 국가 건설의 주체 세력으로 부상하였고 거창 군민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일제 강점기부터 농민 운동을 주도해 오던 인물들이 해방 직후 자발적으로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만든 거창 농민조합은 인민위원회와 신국가 건설 운동을 지지하는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거창 지역 농민들을 대변하였고 거창 청년동맹은 해방 후 거창 군민과 청년들의 민족의식과 독립 의식을 고양시키고 신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거창읍 청년동맹은 거창군민들의 지지를 받았던 거창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거창 좌익 세력의 대중적, 조직적 지지 기반 역할을 하였다.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 참고문헌
1. 조재원,『거창의 지역사회 변동과 민족운동』(2020) 
2. 디지털 거창문화대전

geochang.grandcultur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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