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화양연화(花樣年華)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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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화양연화(花樣年華)1
  • 한들신문
  • 승인 2023.02.13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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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소설가)

나는 소설에서 만난 하나의 문장이나 구절, 혹은 영화의 한 장면이나 우연히 만난 그림 때문에 여행지를 결정하고 계획해서 그곳으로 떠날 때가 많다. 아니면 거꾸로 여행을 통해서, 영화를 다시 만나거나 소설이나 어떤 화가의 작품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곳과 연계한,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를 가슴속에 담았다. 

박혜원 삽화
박혜원 삽화

 

1. 김영하의 <당신의 나무>1)
  김영하의 소설 <당신의 나무>는 1999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으로, 앙코르 와트를 배경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인간관계를 성찰한다. 연애와 여행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앙코르 와트의 오래된 사원을 징그러울 정도로 친친 감고 있는 거대한 나무뿌리와 그곳의 돌을 통해 남녀 간의 사랑, 더 넓게는 모든 관계의 본질을 비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임상상담사인 ‘당신’은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에 홀로 간다. ‘당신’은 그곳에서 사암을 휘감고 있는 판야 나무를 보면서 서울에 두고 온 여자를 떠올린다. ‘당신’에게 테스트를 받던 환자였다. 환자와 가까이하면 안 되는 업계의 룰을 어기고 ‘당신’은 여자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여자가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며 “모든 환자와의 관계를 의심”하면서부터 상황은 나빠진다. 사랑은 한 사람의 세계를 넓고 깊고 풍요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상대방의 존재를 갉아먹고 훼손하는, 파괴적일 때도 있다. 여자가 ‘당신’의 삶에 내린 “씨앗은 점점 더 깊이 뿌리를 내리려고” 했다. 사원의 건물을 무너뜨리는 나무의 씨앗처럼, 여자의 집착이 ‘당신’의 삶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였다. 결국 참지 못한 ‘당신’은 직장을 옮기고 여자와 연락을 끊는다. ‘당신’의 앙코르 와트 여행은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신은 지금 나무를 보고 있다. 판야 나무 한 그루가 사원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판야 나무의 씨앗은 바람에 날려 지붕에서 싹을 틔우고 천천히 뿌리를 지상으로 내려 수분과 양분을 흡수해 올린 후 끝내는 사원 하나를 자신의 뿌리로 온전히 덮어버렸다.   - 중략 -
  누구라도 유적들을 휘감고 탐욕스럽게 커버린 10층 건물 높이의 판야 나무를 본다면 이곳을 떠도는 마성(魔性)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작디작은 씨앗의 위력. 그것에 떨게 되고 자연스레 살아온 날들을 반추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당신 역시 당신의 삶에 날아 들어온 작은 씨앗에 대해 생각한다. 아마도 당신 머리 어딘가에 떨어졌을, 그리하여 거대한 나무가 되어 당신의 뇌를 바수어버리며 자라난, 이제는 제거불능인 존재에 대해서. 
- 김영하의 <당신의 나무> 중에서

  소설 속 ‘당신’은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작디작은 씨앗의 위력”을 지닌 나무의 마성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사랑 또한 그런 마성을 지니고 있어서, 마침내 ‘나비효과’에 의해 ‘수억 광년 너머에 있는 별’까지도 폭파시킬 수 있다는 불안을 증폭시킨다. 미래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사랑이, 종국에는 내가 만들어놓은 세계를 파괴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나비효과’에 대한 ‘당신’의 민감한 반응은 피해망상이며 존재론적인 불안에 불과하다는 것을 <당신의 나무>는 말한다.

  나무가 돌을 부수는가, 아니면 돌이 나무 가는 길을 막고 있는가. 승려는 나무뿌리에 휘감긴 불상을 향해 합장을 하며 말을 이어간다.

  세상 어디는 그렇지 않은가. 모든 사물의 틈새에는 그것을 부술 씨앗들이 자라고 있다네.  -중략-  그때까지 나무는 두 가지 일을 했다네. 하나는 뿌리로 불상과 사원을 부수는 일이요, 또 하나는 그 뿌리로 사원과 불상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도록 버텨주는 일이라네. 그렇게 나무와 부처가 서로 얽혀 9백 년을 견뎠다네. 여기 돌은 부서지기 쉬운 사암이어서 이 나무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흙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 사람살이가 다 그렇지 않은가. 캄보디아의 노승은 해맑게 웃었다. 
- 김영하의 <당신의 나무> 중에서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1) 김영하 외, <당신의 나무>, [현대문학상수상소설집 제44회], 현대문학,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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