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화양연화(花樣年華)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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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화양연화(花樣年華)3
  • 한들신문
  • 승인 2023.03.13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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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소설가)
삽화 김녹촌
삽화 김녹촌

 

영화 <화양연화> 속의 차우와 리첸. 외로운 그들은 좁은 아파트 복도에서 계단에서 그리고 골목에서 서로 가벼운 눈짓만 나눈 채 스쳐 지나간다. 자주 부딪칠 수밖에 없는 그들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서로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고 위로하며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격정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은 아닐지라도 그 둘의 사랑은 그 어떤 사랑보다도 절절하고 애틋하다. 그들 사랑의 아름다움은 스쳐 지나감과 망설임 그리고 절제에 있다. 그래서 더욱 애절하다. 

  영화 속에서 차우와 리첸이 가슴의 슬픔을 안고 스치는 공간은 마치 내가 살고 있는 삶의 뒤안길 같았다. 어두운 거리와 낡은 계단, 좁은 골목으로 이어지는 그곳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주고받는 눈빛 또한 우리네 삶의 모습처럼 슬프고 아련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하고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것이 말이든 글이든 행위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랑은 늘 불안하고 덧없이 흘러간다. 그 무엇도 인간에게 영원한 것은 없다. 더군다나 사랑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지켜지는 것도 아니다. 나와 타인이 관계를 맺어야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그 영원성을 보장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불안한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사랑의 표현들을 주고받으면서 안도하고 때론 행복해한다. 

  그러나 리첸과 차우는 서로 사랑한다는 말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들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메라는 리첸과 차우의 사랑을 우울하면서도 절제된 음악과 함께 관조적으로 그려낸다. 치파오를 입은 장만옥의 모습을 통해 긴장된 고독과 자존심을 스크린 가득 팽팽하게 채운다. 그녀는 단단하게 채운 그 차이나 칼라 안에 자신의 삶을 통째로 유폐시킨 채 빗속을 걷곤 한다. 

  어두운 골목에 피어오르는 양조위의 담배 연기와 장만옥의 가볍게 떨리는 손끝은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을 스쳐가는 애절함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두 남녀는 자신들이 고통받고 있던 순간들이 매우 느리고도 고통스럽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꼈지만 실은 그 순간이, 제목 ‘화양연화’처럼,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이었으며 이제는 흘러가버려 다시는 잡을 수 없는 시간임을 깨닫게 된다. 차우와 리첸의 아름답지만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치르는 아프고도 달콤한 기억일 것이다.

 

  세월이 흘러 가슴속 아픈 사랑의 기억을 안고 차우는 앙코르 와트를 찾아간다. 크메르 왕국의 비밀의 사원인 앙코르 와트로 가, 차우는 공허한 눈빛을 한 채, 수척한 모습으로 양복 윗옷을 벗어 들고 인적이 없는 사원 벽에 기대어 선다. 차우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리첸과의 사랑을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사원의 벽 한구석에 난 구멍에다 털어놓는다. 둘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어 했던 못다 이룬 사랑을, 슬프지만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기억을, 사원의 오래된 돌 틈에다 묻어두고 돌아서 나오는 걸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편집 전 장면에서는 앙코르 와트에서 양조위와 장만옥이 재회하는 것이었다지만, 완성된 영화에서는 양조위만 쓸쓸히 서 있을 뿐이었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앙코르 와트는 시대가 없는 곳이란 점, 그리고 시간의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 곳이어서 좋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 영원한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공간적 배경을 앙코르 와트로 선택한 이유를 말했다. 

  나무는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고 집요하게 돌 틈을 파고들고, 사원은 자신을 무너뜨린 나무에 의지하며 서로의 긴 세월을 견디고 있는 곳이 바로 앙코르 와트 사원이다. 아픈 사랑의 기억을 묻어버리기 위해 일부러 떠나는 길이라면 앙코르 와트가 최적지일 것이다. 또한 앙코르 와트, 그곳에 가면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다.

 

  나만이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곳에만 가면 다시 그 사랑이 살아 돌아올는지... 한때 그러한 사랑을 그리며 <그 길을 가면 다시 봄이 오고>라는 짧은 소설을 쓴 적이 있었다. 

  <화양연화>의 앙코르 와트는 드디어 내 뇌리 속 깊이 박혀, 판야 나무의 뿌리와 함께 더욱 깊게 얽히고설켜들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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