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인과 거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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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인과 거창가
  • 한들신문
  • 승인 2023.03.1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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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신용균

세한도라는 그림이 있다.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가 그린 것으로 일찍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한겨울 노송 그림인데, 그림에 담은 뜻이 지극하다.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는 논어 구절에서 비롯되었으니, 추사가 그린 것은 소나무가 아니라 선비의 지조였다. 소나무가 겨울에도 그 빛을 잃지 않듯이, 지식인 가운데 난세에도 굴하지 않고 대의를 따르는 이가 있으니, 이들을 따로 지성인이라고 부른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나 미국의 언어학자 촘스키가 대표적이다.

  세한도에 걸맞은 거창의 노래가 있다. ‘거창가(居昌歌)’다. 거창별곡, 아림별곡으로도 불린다. 19세기 거창의 선비가 창작한 가사로, 거창의 유생과 농민들이 지방관의 수탈에 맞서 싸우다가 비록 실패했지만, 그것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이재가 어인재며 저재가 어인잰가, 거창이 폐창되고 재가가 망가로다.” - 이 구절은 ‘이재가라는 자가 어떤 놈이길래, 그놈이 거창 부사로 온 후로 거창이 폐허가 되고 모든 집안이 다 망했다’라는 내용인바, 여기서 보듯이 거창가는 묘사가 빼어나고 내용이 사실적이다. 그리하여 창작된 후 널리 유행하여 전국에 퍼졌으니, 심지어 일제 식민지 시대 잡지에 “거창은 폐창”이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지금도 거창가 이본은 전국 각지에서 발굴되고 있다. 일찍이 향토사학자 고 김태순 원장은 거창가를 거창 제일의 보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국문학자 조규익 교수에게 거창가 한 부를 건넸고, 이후 조교수는 거창가를 연구하여 거창가는 “한국 국문학사상 최고의 현실 비판적 저항 가사”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니 거창 최고의 보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이 일이 실제 역사였다는 점이다. 현재 발굴된 1차 사료가 4종인데, 이를 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와 대조해 보면 역사적 사실로 확인된다. 기초사료가 “거창부폐장초”다.

  거창부폐장초는 청원서다. 곧 거창도호부의 폐단을 경상감사에게 고발하는 문서로, 거창부사 이재가의 학정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폐단 여섯, 고통 셋, 억울한 일 둘, 변고 하나, 그리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것 하나 등 총 13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1838년 1월, 이재가 부사가 거창에 부임한 후 자행된 삼정의 문란에서부터 아전, 면임, 군관의 부정과 행패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민중이 당한 고통은 마침내 죽음에까지 이르렀으니, 적화면에서는 세금 강제 징수과정에서 아낙네가 숨졌고, 한유택, 정치광, 김부대 등은 모두 무고하게 곤장을 맞고 죽었다.

  민중의 저항도 기록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회곡이다. 회곡이란 일종의 시위인데, 백성이 관아 앞에 모여서 곡을 하는 집단행동이다. 이 거사를 주도한 이는 이우석이었다. 그는 회곡 사건으로 체포되어 곤장을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것을 차마 보지 못한 그의 어머니는 자결하고 만다. 비극이었다. 결과 또한 그랬다. 수차례의 민중 저항과 청원은 묵살되고 거창 부사는 처벌받지 않았다. 당시 이재가 부사의 포폄을 보면 모두 상 등급이었고, 게다가 1841년 8월 5일 청주 목사로 승진되었다. 그가 떠난 후 유생이 “사곡서”와 “취옹정기”를 지었다.

  사곡서는 ‘네 가지 울음’이라는 뜻이다. 거창 부사가 떠나는 날 유독 4명이 이별을 슬퍼하였는데, 가북 용산, 가조 대초, 남하 살목, 웅양 화촌에 사는 향촌 원로였다. 유생은 이 글에서 그들의 울음을 조롱하였다. 취옹정기는 거창 부사를 풍자한 글이다. 원래 취옹정기는 구양수의 명문장으로 조선 시대 선비들이 즐겨 읽는 글이었는데, 거창의 유생은 이 글을 패러디하여 거창 부사를 풍자하고, 학정의 주인이 이재가라고 명기하였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완성한 가사가 거창가였다.

  거창가의 작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거창가 끝자락에 정자육과 윤치광이 나온다. 정자육은 의송, 즉 청원서를 쓴 인물로, 관아에서 그를 잡아들여 갖은 악형을 가했다. 윤치광은 거창의 폐단을 고치고자 나섰다가 매년 유배를 당했다. 이들은 부정에 저항했던 유생이자, 그 때문에 곤욕을 당한 인물이다. 거창가도 이들이 썼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 유생이 당대 거창의 지성인이었다. 20년 후 더 크게 봉기가 불타올랐다. 난세에 지성인이 등장하는 것은 거창의 뿌리 깊은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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