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은 말한다-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_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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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은 말한다-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_19
  • 한들신문
  • 승인 2023.04.10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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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법대 한입섭 교수

김운섭, 그때 다섯 번 죽었다 살아난 기라 (5)

195호에 이어서

이상하게 죽은 어머니가 가장 무서워

그리고 그것들은(군인들은) 다 떠나고 없어. 그래서 엉금엉금 방에 들어갔는서데, 불을 얼마나 때었는가 그냥 맨몸으로는 거기 누울 수가 없어. 한 쪽 구석에 누워 있다가 밥을 좀 얻어먹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마을에 사람들은 없을 거고, 우리랑 모지랑 할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어. 점도 쳐주고, 사람들 아프면 굿도 해주는. 그 할머니가 우리 아버지하고 친해가지고 거기를 갔어. 그 할머니가 집에 있더라고. 그 분은 피난을 안가고. (할머니가) “느그 아버지가 군인들 짐 지고 갔는데, 못 봤느냐?” 거기서 인자 우리 아버지의 소식을 들은 거야. 꽁꽁 얼은 보리밥하고 소금하고 내놓는데, 어린 게 그걸 먹을 수가 있나. 못 먹었지.

그러고 있는데, 주먹만한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거야. 거기 혼자 있어봐야 도저히 살 길이 없거든. 할머니가 느그 외갓집 쪽으로 가야 사는데, 갈 길이 없다.” 그때 마침 마을의 한 아주머니, 촌에서 정주댁이라고 불렀는데, 그 아주머니가 지나가더라고. 할머니가 그 아주머니를 불러 세워놓고 어디로 가냐고 하니까 남상 쪽으로 간다’, 그랬던 모양이야. 날더러 따라가라고 해. 그런데 건빵을 집에다 두고 온 기라. 게다가 맨발이제, 눈은 오제, 막 망설이고 있는데, ‘왜 안 따라가고 있느냐, 따라가라고 재촉을 하더라고.

그 땐 죽고 사는 건 둘째 치고 건빵 생각이 더 났어. 아쉽지만 억지로 따라 갔는데, 마을에서 약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청수천이라는 개울이 있습니다. 거를 건너는데, 도저히 발이 시려 갈 수가 없는 거야. (발만) 동동 굴렀찌 뭐.

그러고 있으니까 그 아주머니가 가다말고 버선을 하나 꺼내서 신겨 주더라고. 그걸 주더라고, 이거라도 신으라고. 그거 신으니까 구세주 만난 것보다 더 반갑더라고. 그런데 워낙 낡은 버선이다보니 얼마 안가 헝겊이 너덜너덜해져. 거기에 눈이 똥글똥글 맺혀가지고 밟으면 더 아파.

어쨌든 죽다가 살아나온 학살 현장으로 다시 가는데, 딴 사람은 안 무서운데, 우리 어머니가 너무 무서운 기라. 우리 어머니가 나와가지고 내 발목을 땡길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드는 기야. 그래서 (죽은 어머니) 옆을 지나가는데,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곁눈질로 쳐다봤어. 까마귀가 거마 새까맣게 앉아서 송장들을 뜯어먹고 있는 거 있지.

그 고개를 넘어, 남상면 무촌 매산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요새는 길이 잘 되어 있지만 그때는 사람만 갈 수 있는 길이었어요. 거기서 쉬어 가기로 했는데, 나는 아무 것도 못 먹은 상태에서 춥고 고생만 해놓으니까 앉으니까 술술술술마 쓰러져버리는 거야.

인자 그 아주머니가 어지간히 쉬었으니까 가자고 그라는데,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요. 도저히 못 일어나니까 그 아주머니가 내가 신고 있던 버선을 벗겨서 눈을 덮어줘요. 여기서 죽으면 까마귀들이 눈을 파먹는다고 덮어주고 가는 거야. (아주머니가 가려고 하는데) 내가 살려고 그랬는지 고종사촌형수가 나타난 기야.

그 아주머니랑 형수랑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까, 먼저 피난을 갔는데, 우리 고모가 뒤쳐져서 데리고 가려고 돌아오는 거라고 해. 그러면서 신원이 어떻게 되었다는 둥, 아무개는 어찌 됐냐는 둥 그런 얘기를 해. 그 얘기가 귀에 다 들려.

그래 자는 누군데 저래 놨냐?” 이라니까 그 아주머니가 문섭인데, 저 놈이 청수태(청연)에서 살아나와서 여기까지 왔는데, 도저히 안 일어난다. 이제 죽을란갑다.” 하고. 그래서 형수가 내 가슴에다가 귀를 대보고, 맥을 쥐어보더니 아직 죽지는 않은 것 같다.”, 그카더라고. 그리고 눈을 덮어놓은 버선을 집어던지고, 어디서 손바닥에 물을 떠와서는 내 입에 넣어 주더라고. 그러면서 나를 업고.

거기서 우리 외갓집이 약 1km 정도 남았어요. 형수가 나를 그 신작로까지 업어다주더라고. 가는 길에 탁 정신이 돌아오더라고. 그래서 형수카니까 인자(이제) 정신이 드느냐이거야. 눈물밖에 안나는 기라. 인자 우는 거지. (형수가) “지금 신원을 넘어가면 안된다. 군인들이 사람 다 죽인다. 가지마라.”라고 해. 그래가지고 자기는(형수는) 나를 거(신작로에) 내려주고, 나는 우리 외갓집으로 간 겁니다.

 

이틀 사이에 세상 다 산 기분

그러니께 내가 다섯 번을 죽을 뻔한 기라. , 청연에서 한 번 죽었지요. 내동 마을에 왔다가 군인을 보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얼어서 죽을 뻔 했제.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군인한테 들켜서 개머리판 맞아가 죽을 뻔 했제. 또 우리 집 와서 군인이 총 쏴서 죽을 뻔했제. 아주머니 따라 외할머니집으로 가다가 지쳐 죽을 뻔한 거 아입니까. 그러니까 이틀 동안 내가 다섯 번을 죽은 거야. 딱 이틀 사이. 9일과 10, 이틀 사이라. 그 동안에 내가 세상을 다 살은 겁니다.

그래 다섯 번 죽었다 살아가지고 외갓집으로 갔는데, 우리 아버지가 거기 계시더라고. 우리 외갓집이 신작로 가에 있었거든. 어느 날 기관총을 든 군인들이 요즘 말로 쓰리쿼터(3/4톤 트럭)에 타고 가는 광경을 목격했어. 차가 뭐 몇 대 되더라고, 숫자는 안 세어봤는데.

그 당시는 군인들이 저리 다니느라 생각했어. , 그 사람들이 가고 난 뒤 얼마 안 있어 총소리가 나더라고. 거서 얼마 안돼 총소리는 들리거든. 그때는 그것이 뭔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것이 국회조사단이었든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이후 제가 난리 때문에 열한 살에 신원초등학교를 들어갔어요. 그때도 박산에 시체 수습하러 댕기는 두루마기 입은 사람이 많이 왔다갔다 하는 거예요. 6학년 1학기쯤 되어가지고, 우리 마을에 백연제라고, 백 면장이 있는데, 우리 아버지하고 친굽니다. 그 어른이 “(사건의 전말을 아니까) 자는 여 놔둬서는 안 되겠다. 서울에 있는 즈그 형한테로 보내라. 저 놈은 (여기 있으면) 어느 때 어째 끌어다 죽일지 모른다.”라고 해서 제가 객지에 일찍 나갔습니다. 57년도인가, 그때 제가 열다섯인가, 열여섯인가에 객지에 나갔습니다. 죽일지 모른다 해서.

 

책만 펼치면 그 생각밖에 안나는 기라

그 백면장이라는 어른 때문에 서울에 일찍 가게 되었어요. 그 후로 그 사건이라는 거는 생각도 하기 싫고. 1년 놀다가 중학교를 들어갔는데 책을 펼치면 머리에 그 생각밖에 안나는 거야. 공부가 안 되는 거야.

그 당시는 시시한 학교는 등록금만 내면 졸업했거든. 그래서 고등학교까지 댕겼지마는 전부 낙제점수로 졸업했어. 60점 이상을 받아보지를 못했어. 내가 인창중학교를 나왔고, 고등학교는 수성전기공업고등학교를 나왔어.

학교 댕기면서 고향에 가끔 왔지요. 고향에는 아버지가 계시니까 왔고, 제가 유족회 활동을 어떻게 하게 됐냐면, 1988년도 월간조선9월호, 김재명 기자가 거창사건에 대해 쓴 기사를 봤다고. 그 책은 지금도 집에 있습니다. 그 기자를 찾아 갔어요. 가서 거창에 유족회가 있냐?” 하니까 있다고 그라더라고.

그 당시가 문병현이라는 분이 회장을 할 때였어. “그런데 한동석이는 어디 사냐?”고 하니까 안양에 산다.”, 이거야. 그러면서 그 기자가 한동석이 주소, 전화번호, 또 부산에 사는 문병현 회장 주소, 전화번호 다 적어 줘서 자발적으로 문병현 회장한테 전화를 해가지고, “, 유족회가 있습니까?” 하니까 있다.”, 이거야. “그라믄 나도 유족회 활동을 해야 되겠다.”고 했어요.

 
▶197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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