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은 말한다-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_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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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은 말한다-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_20
  • 한들신문
  • 승인 2023.04.2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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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법대 한인섭 교수
▲거창사건 생존자 김운섭. 본 책에서 발췌.

…196호에 이어서 
88년도에 위령제를 지낸다 해서 내려와 보니까 다 박산 유족들인데,(울먹임) 박산 합동묘역, 여만(여기서만) 합동위령제를 지내더라고. 그래 내가 “형편이 잘못된 게 아니냐?” 했더니 “왜 그러냐?” 이거야. “합동위령제라면 제3의 장소를 택해서 전체 합동위령제를 지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래가지고 제가 당시 문병현 회장하고 타협해가지고 89년도부터 합동 묘소 위쪽에서 지내게 됐어요.
 

  89년도, 음력 7월 28일인가, 29일인가 그럴 겁니다. 그때 제1회 전체 합동위령제를 지내게 되었다는 겁니다. 올해가 15회인가, 16회인가 될 겁니다. 그때부터 제가 유족회에 발을 디디놔가지고(디뎌놔서) 협조도 하고, 서울지회도 만들었어요. 서울의 유족들을 모아가지고…. 그때 이철수 고문을 찾아가지고 그분을 회장을 시키고 내가 총무를 하고, 이렇게 쭉 지내왔지요. 서울에서 특별법 만들고 그럴 때 시골에서 사람들이 올라와 누구 국회의원 만나러 간다고 하면 만날 장소와 시간 정하는 거, 그런 일을 제가 다 했지요. 그러다가 2000년도에 거창에 아주 정착하러 내려왔습니다. 1999년도에 임호섭이라는 분이 회장을 할 때였는데, 그때 제가 총무를 보고 있었어요. 우리 전 회장님이 2000년도부터 2002년까지 회장을 하고 했는데, 그때도 총무를 보다 2002년부터 제가 회장을 하고 있는 거죠.

 

한동석 씨 집에 찾아간 적은

  한동석씨 집에 찾아 갔다고 말씀하셨지요?
89년도 7월인가 8월, 제가 적어놓은 것에는 정확하게 날짜가 있는데…. 한동석 집에 왜 갔냐면, KBS에서 거창사건 다큐멘터리를 찍을라고 권오석 PD와 제가 현지답사를 하러 왔어요. 그래서 한동석 주소는 내가 알고 있으니까 내려가면서 한번 가보자. 그래가지고 한동석 집을 찾아간 거예요. 가 보니까 3층 집을 지어놨는데, 아래층에는 슈퍼마켓을 하고, 2층에는 한동석이 사무실로 쓰고 있더라고. 3층에는 가정집으로 쓰는데, 호화롭게 잘 살고 있더라고요.
  권오석 PD라고 나하고 2층에 올라갔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더라고요. 가서 그 집 벨을 눌렀지. 눌렀더니 안에서 여인 목소리가 나더라고. 그래 ‘방송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문을 안 열어줘요. “뭐 때문에 왔냐?” 그래 “잠깐 물어볼 게 있어서 왔다.” 한참 경계를 하더니 문을 열어 주더라고. 그래 거실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현관에서 여러 가지를 한참 물어봤어. “지금 한동석 씨 살아 있냐?” 그랬더니 “5월 25일날 죽었다”라고 그라더라고. 몇 년도인가는 생각이 잘 안 나고. 그래서 “유품이 있냐? 아니면 남겨놓은 게 있냐”이라니까 “아무것도 없다. 모른다.”라고 얘기를 해. 부인이 키가 조그맣고,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는 곱슬머리 아낙이었어요. 그렇게 한참을 얘기를 하다 거실로 안내가 되었는데, 인자(이제) 커피를 내어 오더라고. PD는 먹었지만 나는 그 커피를 안 먹었다고. “유품이나 남긴 말이 있냐?”라고 하니까 “텔레비전 보다가 억울하다는 소리를 했다.” 라는 거야. 살았을 때…. 한 시간 동안 얘기를 했지만 그 말 한마디밖에 못 듣고 왔어요.
 

내가 한동석이한테 편지도 두 번씩이나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안양으로 보냈더니 ‘자기도 할 말 있다’ 이거야. ‘우리 유족 대표하고 한번 만날 용의가 있냐’고 하니까 ‘그렇다’고 해. 그래서 ‘우리는 당신을 보복의 차원에서가 아니고 화합의 차원에서 만나고 싶은데, 한번 만나자’ 그랬더니 답변이 없어. 그때는 주민등록 추적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거든. 안양에 우리 유족이 하나 있어가지고 “답변이 안 오니까 주민등록 추적을 한번 해봐라.” 이랬더니 강남구 AID 아파트로 주소를 또 옮겼더라고. AID 아파트 몇동 몇호까지 주소가 나오니까 그때 또 편지를 했어. 그때는 좀 과격하게 썼어. ‘왜 답변은 안하고, 장소만 옮겨 다니느냐? 유족과 만날 용의가 있다고 해놓고 왜 안 만나느냐?’ 그때는 협박을 좀 했지. ‘끝까지 이러면 너 니 명대로 살지 못한다. 우리 유족이 가만 안 있는다. 떳떳하다면 해명해라’ 이렇게 편지를 두 번 보냈다고.
  내가 전화도 걸어봤는데, 바꾸라고 하니까 안바꿔주더라고. ‘어디갔냐’고 했더니 ‘나갔다’고 그래. 그 마누라가 (그렇게) 얘기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끝까지 느그들이 이렇게 (진실을) 은폐를 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유족과 만난다고 그래 얘기해놓고 애 피하느냐? 만나자!” 나중에는 내가 흥분해서 반말로 이래 하니까, (그 여자가) “왜 반말을 하느냐?” 이거라. 그래서 ‘니 남편이 어떤 놈인지 아냐? 수백 명을 죽인 살인자야’ 이런 식으로 협박을 했거든. 그런데도 그 여자가 전화는 안 끊습디다. 끝까지 다 들어. 나중에는 별소리를 다 했지.

옷에 불붙었어도 죽은 척하고 살아남아
  부상자나 생존자는 얼마나 있습니까?
현재 생존해 있는 분은 5명인데, 총상을 당한 사람은 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지금도 다리를 절고 있고, 절뚝절뚝하고 돌아댕기고. 나는 당시에 2월 5일날 군인이 방에 들어와 총을 쐈다 그랬잖아요. 그때 고막이 나갔어. 그걸 가만히 놔두었더니 고름이 흘러가지고. 그때는 촌에 뭐 병원이 있었습니까? 그대로 놔둬가지고 귀가 이거 지금 병신이 된 거야. 그래가지고 60년도 3·15 부정선거 때 3월 15일날 아침에 서울 성모병원에서 수술을 했어. 가만히 놔두면 뼈가 썩어서 죽는다고 해서. 그런데 이것도 보상이 될랑가 안될랑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현재로서는 부상자 보상을 한다면 한사람밖에 없지 싶어.
  그러니까 청연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다섯이고, 탄량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한 명 있어요. 이 분은 곽건섭 씨라고 현재 부산에 사는데, 마을에 있다가 관통상을 입었어. 그리고 박산에서 살아난 사람이 정방달. 청연에서는 남자는 김운섭, 김운출, 또 여자는 정영자, 김경순, 김미자가 살아남았지. 

이 중에 아직 살아있는 분은 누군가요?
  청연학살에서 살아난 사람은 다 살아있지. 전부 애들이었으니까. 나도 당시에 아홉 살짜리였다고. 내가 당시에 아홉 살이었고, 운출이가 두 살인가, 세 살인가 그렇고 정영자는 열 살, 경순이가 다섯 살이었고, 미자가 두 살인가 그랬어.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있지. 내가 아까도 얘기를 했지만 군인들이 죽은 엄마 젖꼭지를 빨고 있는 몇 애들은 안 죽이고 그냥 갔더라고. 차차 죽을 줄 알고 그랬는 모양이라. 그나마 청연에서는 불을 안 질러서 살 수 있었던 거야. 나중에 들으니 탄량에는 불 질렀다 하대. 임분임 아주머니는 '옷에 불이 붙었는데도 뜨거운 걸 참고 죽은 척해서 살 수 있었다’고 하대. 탄량은 기름은 안 뿌리고 나무에 불을 붙여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어. 박산에서는 나무를 깔고, 기름까지 부어 불 질렀고. 그래서 제일 많이 죽었던가 봐. 아까 박산에서 정방 달이라는 사람이 살아났다고 했제. 그 사람은 바위 밑에 들어가서 살 수 있었다고 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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