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은 말한다-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_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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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은 말한다-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_22
  • 한들신문
  • 승인 2023.06.07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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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법대 한인섭 교수
▲거창사건 생존자 권필달  씨. 본 책에서 발췌.
▲거창사건 생존자 권필달 씨. 본 책에서 발췌.

저는 권필달이라고 하고 지금 77살입니다. 그때 늦은 저녁을 먹을 때였는데, 우리 신랑이 낮에 어딘가 가 있었거든. 콩나물 무쳐놓고, (신랑이) 오면 먹자,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서 총소리가 나는 거야. 뒷집에 (형님들) 아랫방이 있어서 아이를 데리고 쫓아가니까 저기서 총알을 쐈는데, 안 맞았어. 빨긴 불이 팍팍 날아가는데….
  형님들 아랫방으로 가니까 ‘동서, 어서 오이라’ 하면서 ‘엎드리라’고 하는 거라. 그러고 있으니께 무슨 소리가 와스락 와스락 하니까 방위대 장교 엄마가 내다보더니 “아이구, 야들아, 우리도 나가자.” 그라는 기라. 보니께네 전부 손들고 나오는 기라. 내가 얼마나 급했는지, 일곱 살 먹은 아이, 네 살 먹는 아이 신발도 안 신기고, 그만 손만 잡고 쫓아 나왔는기라. 나오니까 우리 집에도 불 질러 버리데.

어린 딸들은 밥 달라 보채고
  그때부터 골짜기로 가면, 나는 살길이 없다 싶어서 다른 사람보다 빨리 내려 왔는기라요. 아이를 업고…. 보니께네 제일 먼저 간 사람들은 학교 운동장으로 쏙 들어가 버리데. 우리는 한 줄로 섰어요. 그러고나니께 군인들이 ‘교실로 들어가라’ 하는 거라. 나는 딸만 셋이었고, 친정 오빠는 식구가 넷인데, (서로) 등을 기대있고…. 
  날이 새니까 젊은 아저씨들 빼서 나가고, 그다음에 새댁, 각시, 큰애기 빼서 나가고. 군인들이 후래쉬로 비춰보면서 ‘군인들 밥 해줘야 한다’ 하면서 데리고 가버리고, 또 군인들 가족, 그 사람들 빼내고….
  가만 보니까 아무래도 죽이지 않으면, 때려 패기라도 할 것 같은 거라. 그래 마, 아이 둘 떼어내고 나간 사람을 쫓아 나와버렸어요. 쫓아나오니까 문 앞에서 막 밟고 패는데, 안 죽을라고 다시 교실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가니까 딸 둘이 가 엄마가 뭐 하고 왔는지도 모르고, 배가 고프니까 “엄마, 밥 줘”, 그러는 거라. 저녁 굶겼지, 아침 굶겼지 하니까 밥 좀 달래.
  조사하는 사람들, 그 화랑부대가 눈도 빨갛고, 모자도 삐딱하게 쓰고, 참 무서워요. 손을 들고 있는데, 자꾸 총으로 들이대더라고…. 그래서 ‘방위대 장교가 우리 시동생이라고’, 이래 했거든. 이리 오라 하는 거라. 그래, ‘신랑은 어디 갔냐’고 해서 ‘여기 와서 부역 나갔다’고 하고 그래 나왔는 기라요.
  내가 나오고 뒤로 한 집 더 나오고 문이 딱 닫혀 버렸어. (그러고 나서 다른) 교실로 들어갔더니, 군인 가족한테 주먹밥을 한 뭉텅이씩 주더라고. (형님이) ‘동서야 앉으라’고 하는데, 그만 앉지도 않았는데, (군인들이) ‘운동장으로 나가라’고 하대. 그래 나오니까, 운동장에서 ‘앉아라’, ‘서라’, 훈련을 한번 시키데. 그러더니 “웃동(윗동네)으로 가면, 바로 총 쏴버리니까 아랫동(아랫동네)으로 내려가라” 카대. 그래서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습니까?

가슴이 매여 주먹밥이 안 내려가
  교실에서 빠져나와서 또 분교학교에서 하루 잤어요. 우리 오빠는 바로 외갓집으로 가버렸고요. 분교학교로 간 사람이 제법 많은데, 한 20명, 한 30명 되었나 몰라. 그때 영감들은 있어도 젊은 사람들은 없었을 거구만. 친척 있는 사람들은 바로 가도 되는데, 우리는 그만 친척이 없으니께 분교 학교로 바로 넣던데요. 거기서 하루 자고….
  그때 면장이라는 사람이 ‘군인 가족을 이리 많이 빼냈냐’고 하던데. 우리 영감이 그 전에 반장을 해서 면장이 오면 닭도 잡아서 밥도 해 먹이고 그랬는데….
  가니께네 흰 두루마기 입은 어른이 오더만 “참 잘 오셨다. 여기 나오신 사람은 다 살았다. 남은 사람들은 다 죽었다”, 그러는데, 사람들이 막 우는 거라. 그 어른이 흰 두루마기 안에다가 담배를 가지고 와서 담배 필 줄 아는 사람은 주고…. 다른 사람들은 막 겁이 나서 간이 뛰 울리고….
  그 흰 두루마기 입은 사람이 그 아랫동네 구장이더라요. 그 사람이 오고 나니 살판이 나고, 서로 농담도 하면서…. 여기 나온 사람들한테는 “주먹밥을 해서 한 뭉텅이씩 줄 터이니 요기 하라” 하는 기라. “우리 마누라도 아들한테, 젖을 뺏기니까 밥을 많이 먹던데, 아이 딸린 사람은 한 뭉텅이 더 준다.” 하고…. 그래 나한테는 네 뭉텅이를 줘요. 그래서 그 날 저녁에 먹는데, 가슴이 메여서 밥이 긁어내려 가는 것 같아요. 이튿날에는 아이도 안 먹고 어른도 안 먹고 밥을 못 먹어. 분교 학교에서 하룻밤 자고. 그 다음 날은 그 사람들이 이제 먹여 못 살리거든. 그래 보내주데요. 그래서 나도 외갓집으로 간 기라.
  그런데 피난한 사람들은 계속 조사한다고 잠도 못 자게 해. 피난민들 몇 명인가 그거 조사하고…. 그래 일주일 있으니까 먹을 거 갖고 오라는 거라. 그러면서 내가 25세였는데, 나더러 ‘여성 동무!’, 이라는 거야. 그래 할아버지들하고 뭉쳐서 다니니까 그런 소리 안 하더구만. 혼자 다니면 그놈들이 놀리려고 그라는 기라. 
  피난한 지 일주일 만에 집에 갔지요. 그래 가는데, 우리 동네 들어가는 데가 보이는 거라. 까마귀 떼가 막 날아다니고. 그래서 들어가지도 못해보고…. 난 우리 어머니가 저기서 저리 되었나 보다 하고, 마 울고…. 신랑은 나 죽었는가 여기고 나는 신랑 죽었는가 여기고…. 집에 가니까 솥을 떼 놨길래 신랑이 산 줄 알았지.

돌도 안 지난 딸은 열흘 뒤 죽어버려
교실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있었던 얘기를 좀더 해주세요.
  내 생각에 (군인들이 사람들을) 안 죽이면, 두드려 팰 것 같아. 그래 나가는 꾀밖에 안 나더라고요. 그래 아이를 떼내고 나와서 두드려 맞았어요. 나오다가 두드려 맞아가지고, 애기가 두드려 맞아서 조금 있다가 죽어버렸다 아이요. 나를 두드려 패는데, 아이를 업어 놓으니까 아이가 많이 맞았지, 내가 맞았겠어요? 그래 한 열흘 있다가 아이가 죽어버렸지. 돌도 안 지난 아인데, 내가 아이가 셋이니까 4살, 7살, 막내가 돌도 안 지났지. 몇 개월 되었는고는 모르고…. 저기 골짜기 어디에 묻었는데, 나중에 가보니께 골짜기가 패여가지고 없더라. 

그러면, 아기는 사망자 명단에도 안 들어갔겠네요?
  안 들어갔지요.
  
두드려 맞고 도로 들어갔어요?
  예. 도로 들어가서 조사를 받았는 기라. “너희, 신랑 어디갔노?” 그래 묻고, “군에 어디 갔노?” 그래. “이운하라고 우리 시동생이 방위대다.” 이래 말했제. 이운하가 우리 앞에 살았는데, 즈그 가족들만 쏙 배갔어. 그래도 그 사람 핑계대고 나왔으니꼐….

그러니까 할머니는 군인 가족, 경찰 가족이라고 주장을 하고 나온 거네요.
  거짓말을 하고 나온 거지. 그때는 거짓말도 쓸만 하데요.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 사람 경찰 가족 아니라고 막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네.

한사람 한사람 다 조사를 받았습니까?  
  그렇지. 낱낱이 다 받았지요.

그때 이름과 주소도 다 물었어요?
  주소도 안 묻고, 이름도 안 물었을 기다. 이름 안 묻고 ‘느그 가족 어디갔냐’, ‘있냐’, ‘없냐’ 그거 묻고, 그것만 했을 끼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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