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띄우다】숨바꼭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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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띄우다】숨바꼭질
  • 한들신문
  • 승인 2023.07.10 0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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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배달부, 염민기 시인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읍내 저녁 모임하고 돌아오는 길

아카시아향 코끝에 매달려

달달해지려는데

개구리 목숨 걸고 자기 길 간다

요리조리 몸 비틀며 지뢰밭 가듯

바퀴 굴린다

풀숲에선 길고양이들 튀어나와

얼른 집에 들어가라고 혼내려다

집도 없는 애들에게 상처 줄 뻔한 입

꼭 붙여놓는다

늘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고라니

친구하고 싶어

라니야, 라니야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도망가 섭섭해하다

그들의 길에 들어 선 무법자임을 깨닫는다

투사처럼 달려드는 날벌레들의 희생은

흐린 날 별자국처럼 아련하게 남는다

안개는 바닥을 기며 유령처럼 몰려오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에워싸면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차에서 내려

또 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만 싶어진다

한 마리 어린 짐승이 되어

 

거창문학 32, 2022

 

고라니에게도 우리에게도 오늘 하루도 무사히

시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무사히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아무 탈 없는 편안한 귀가, ‘요리조리 몸 비틀며 지뢰밭 가듯뭇 생명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아카시아 향이 전해온다. ‘라니, 냥이라는 고운 이름 앞에 우리는 어쩌면 그들의 길에 들어선 무법자라고 말하는 자기 성찰에 대한 의미가 깊다.

사람과 동물 모두가 피해를 입는 로드킬은 연간 400건에 달하고 희생되는 동물 수는 연간 30만 마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로드킬을 가장 많이 당한 동물은 고라니이다. 두 번째로 많이 죽은 동물은 고양이다. 개체 수나 습성 때문에 특정 동물이 빈번하게 로드킬 당하지만 개, 조류 등 모든 동물이 죽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두 손 두 발 다 들고한 마리 어린 짐승이 되어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공존하며 공생하는 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만 싶어진다는 시인의 감성 속 지녀야 할 여리고도 굳센 마음을 엿본다.

흐린 날 발자국처럼 아련하게 남는 시편에서 그 옛날 이발소 등에 걸려있던 기도하는 소녀액자 속 문구가 생각난다. 고라니에게도 우리에게도 오늘 하루도 무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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