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은 말한다-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_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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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은 말한다-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_27
  • 한들신문
  • 승인 2023.08.2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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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법대 한인섭 교수
▲거창사건 생존자 김용재 씨. 본 책에서 발췌.
▲거창사건 생존자 김용재 씨. 본 책에서 발췌.

저는 김용재라고 하고 지금 79, 을축년생입니다. 25년생이고. 먼저 우리 어무이가 죽은 얘기를 할게요. 그러니께 박산 사건 나던 초엿샛날 같아요. 음력으로. 학살된 고 이튿날 함양서(에서) 있으니까네 연락이 왔어요. 가족이 희생됐다꼬. 그래서 인자 저가 (집으로) 왔어요. 왔는데 그때는 이미 큰 부대는 다 이동해삐리고 일개 중대만 있었어요. 아부지하고 나하고 삼촌하고 거서(거기서) 우리 어무이가 희생당했다꼬 하는데, 시체를 못 찾았어요. 우리 어무이는 (키가) 5척 서()인가 그런데.

 

어딜 가나 순전히 경찰 가족이라 한다

우리 어무이가 초닷샛날인가, 박산서(에서) 한 날(군인들이 사람들을 죽인 날)하루 앞날이요. 소를 몰고 오다가 어떤 군인 한 분을 만났어. 만났는데, ‘소를 내 돌라꼬카더랑께. 그때 어무이가 인자 소를 안 준다꼬, 막 거부를 하니께네, 인자 옥신각신 실강이가 났어. 그때 아부지도 도착허고, 긍께 인자 그 사병하고는 얘기가 안되니께 아부지가 좀더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 좀 나슬까(나을까) 싶어서 갔다 왔는데, 뒤에 총소리가 났던 모양인데, 오데서 어떻게 희생됐는고, 시체를 못 찾는 기라요. 그때 우리 아(아들)도 현재 경찰에 있으니까네, 그저 용서를 빌었다고 해. 고마 거짓말을 칸다카대. 어델 가니까네 순전히 경찰 가족이라 칸다고.

나도 인자 그 뒤에 초이렛날 왔제, 이렛날 와 가지고 어무이 시체를 암만 찾아도 도저히 찾지를 못해요.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박산에 있을까 싶어서 함(한번) 건너가보자 해서 서이(셋이) 갔었습니다. 가니께네 말하자면 우에다가 기름 가지고 꼬실라놓으니께네(그슬려놓으니까) 온 전체가 새카마이 숯처럼 되어있었어요. 마 그런 광경 보고. 그 당시에 저가 어머니를 못 찾았어요.

한 일주일쯤 있으니까 연락이 왔어요. 시체를 찾았다꼬. 근데 어머니 산소가 박산, 그 짝에서(쪽에서) 멀지 않은 기라. 그 당시에 빈 집이 있었어요. 그때 화장을 해 가지고 가마니로 덮어놨더랍니다. , 그렇지요.

 

Q) 군인이 박산 입구를 막고 있었습니까?

군인들은 없었고, 아무도 없었어요. 인자 먼 데 경비초소가 있었는데, 고함을 질러쌌테. ‘가지 마라캐싸니까 허가 받고 간다일캤어요. 그날이 참 추운 날이거든요. 냄새는 하나도 나도 안나고 똑 그 사람 같이 안 비이요(보여요). 전체가 새카마이 머리도 똑 아들(아기들) 중대가리처럼 말이지. 이기 안가(아인가), 어른인가, 이해를 몬할 정도로 돼 버렸어요. 그래놓으니까 사람이 쪼매나이 그리 보이데요. 그래서 마 그냥 돌아섰어요. 작은 아버지는 이리이리 해 보자, 캐쌌트만 내가 이거 그래가지고 찾을 문제가 아니라꼬.”

그 며칠 후에 (시체를) 찾았다고 이래 연락이 왔어요. 내가 가보고도 못하고 바로 고 옆 산에다 임시매장했다가 지금은 딴 데로 옮겼지요.

 

군인이 사람 죽일 줄은 우리 경찰도 몰랐어요

Q)그 당시에 함양해서 경찰을 하고 계셨습니까?

함양 경찰서 유림서 순경을 하고 있었어요.

 

Q)함양 유림에서 27일날 사람들이 죽지 않았던가요?

거창하고 같은 날인가, 몰라. 하루 앞인가 그래요. 그때 군인들을 만났지. 그때 우리가 애당초 일이 있었거든. 군인들이 말이죠. 그저 계몽활동한다꼬 민간인을 소개(疏開)해돌라꼬 해요. 그래서 우린 그런 줄 알고, 소개하고 그랬거든요. (사람들을) 거 모아놓더니 그만 총을 들이대는 거라. 그 당시에 우리 경찰들은 말렸어요. 그때 그 지역 경찰서장이 송호상인데, 말려가지고 대대장한테 마이 뚜들기 맞았어요. “니가 머 안다꼬?” 이래 가지고 마이(많이) 뚜들겨 맞았십니다.

인자 장소는 함양 유림이라도 바로 음천강이 있어 가지고 바로 산청 금서면이라. 근데 희생된 사람이 숫자가 한 50명 정도삔이(정도밖에) 안 됐어요. 나는 그렇게밖에 안 봤습니다. (거기) 지서 근무했으니까 내 봤지. 그 당시에 송호상이라는 사람이 군인 가족은 다 나오라’, 이래 되었거든요. 근데 눈치 빠른 사람은 나오고, 나온 사람은 나왔어요. 현지에 살아나온 사람도 있었어요. 그 앞에 또 방곡이라고 있어요. 거서(거기서) 좀 학살했다는 말도 있고, 우린 거는(거기는) 안 가봤으니까네.

(군인들이) 그리(거창으로) 갔던 건 몰라. 그 뒤에 갔던 걸 알았지. 그 당시에는 그 부대가 어디로 갔는지는 몰랐지요. 모르는데, 음력 초이렛날 저에게 연락이 왔어요. 그때 그 노인이, 이미 자수했지만, 그 사람이 탈영한 사람이라요. 그 사람이 나한테 연락을 해주고 그랬어요. 거창서 막 사람들 학살을 마이 했다, 신원 사람 다 죽었다. 그래서 제가 서장한테 사전에 연락할 시간도 없고 해서 얼른 가본 기라요. 그때만 해도 우리 어머니가 희생당했다는 건 모르고 갔어요. 가니께 그리 돼 있더란 기라요.

그때 당시가 초이레 됐을 기에요(거예요). 사건 난 하룬가 이틀 뒤이니께네. 아마 12시 좀 넘었는가 모르겠어요. 아무리 찾아도 못 찾으니까네, 행여나 (박산) (거기) 있는가 싶어서 간 기라예.

우리 아부지하고 삼촌하고 서이(셋이) 딱 갔어. 그때 인자 말하자면 일반 사람들은 완전히 통제, 금지되고 있었는데, 그때 내가 중대장한테 이야기했거든요. 중대장은 그때 학교 사택에 있었어요. “어머니 시체를 못 찾는데, 좀 찾도록 해 돌라(달라)” 하니까 가 보라꼬 카데요. 그때 허가 없이는 못 갔어요. 그때 일개 중대가 있었어요. 다 모두 철수해삐리고(철수해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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