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은 말한다-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_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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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은 말한다-생존자·체험자들의 반세기만의 증언_25
  • 한들신문
  • 승인 2023.07.2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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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법대 한인섭 교수
▲거창사건 생존자 문철주 씨. 본 책에서 발췌.
▲거창사건 생존자 문철주 씨. 본 책에서 발췌.

저는 문철주라고 하고, 칠십 한 살입니다. 그때가 제가 열아홉 살 때인데, 제가 살던 곳이 배개마을이라고 할배할 때 배, 베개할 때 개 자를 씁니다. 그 당시에 마을이 한 45세대에서 50세대가 살았습니다.

인제 삼촌하고 저하고 둘이서 한 방에서 잤습니다. 그때가 210일날이었을 긴데, 갑자기 새벽에 총소리가 마이(많이) 나드마는 군인들이 우리 마을을 집중사격을 했습니다. 그때 군인들이 산청군 오부 쪽에서 넘어왔습니다. 그래 겁이 나서 저는 그 마을을 살고 있는 봉재라 카는 사람하고, 한 사람은 기억이 안 납니다만 서이서(셋이서) 총탄이 무서워서 기냥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다가 요 앞에 마을까지 오다가 보니까 군인들이 저 위에서 내려오거든. 총탄이 겁이 나서 요 건너로 산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군인들 낌새가 이상해서 상황으로 피신

그래가지고 그 쪽에 가 서이서(셋이서) 숨어 가지고 있으니까, 어디선지 군인들이 왔어요. 와가지고 총을 가만히 드는 기라. 이 새끼들 어데 가느냐꼬. 그래 서이가(셋이) 손들었어요. 그리곤 인자 울로(위로) 올라가니까, 그때 군인들이 아침밥을, 김밥을 묵고 있드만. 그래서 이제 정중하게 다가갔어요. “우리는 아무 죄도 없고, 살리주십쇼하니까 이 새끼, 젊은 놈의 새끼들이 뭐 하러 이까지 와?” 하고. 그래 총탄이 무서워 왔는데.” 하니까 빨리 가라. 돌아가라.”

그래 돌아가는 도중에 매매깍이라고 있는데, 거 가는 요만한 소로(小路)에 그때 한 40대 되는 남자가 총탄을 맞아가지고 거서 누워 있는 기라. 그래 그 옆을 보니까 마흔 다섯 살쯤 됐는가, 여섯 살쯤 됐는가, 애가 우리를 보고 우리 아부지 좀 살리 달라이캐, 총탄을 요 맞아 가지고 입에 거품이 나와 있드라꼬. 그래 할 수 없어서 그 어른을 저희들이 교대로 등에 업고 고 마을에 갔으요. 마을에 가니까 자기 집도 있더만요. 그때 마루에 눕히 놓고, 그래 우리 집으로 가니까 (집들이) 끼리끼리 불타가 있고(불에 타버렸고) 거의 다 타뿌렸지요. 그냥 이제 할머니만 혼자서 통곡을 하고 계셨고, 작은 아부지도 인자 통곡을 하고 계신 기지.

고마 할머이가 하시는 말씀이 군인들이 하는 행위가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여기 있다가는 느그 아무래도 다 죽겄다.” 나하고 삼촌하고 또 숙모하고 내 사촌 여동생이 그때 태어나 가지고 있었는데, 네 사람은 그날 밤 심야를 기해 가지고 상황으로 도주를 했습니다. 도주해 가지고 상황 장미리에 가서, 그짝으로 피신해 가지고 살았습니다.

통조림마냥 엉켜서 누군지 구분이 안가

살았는데, 3일 있다가 삼촌하고 둘이서 가니까, 유족들이 모여 가지고 통곡을 하고 있드라꼬요. ‘왜 그러냐?’ 물으니까 있는 사람 다 죽었다이거라요. 이제 군인들이 딱 경비를 서 가 있고 하니까 넘어오지는 못하고, 그래 도로 돌아갔습니다.

돌아와서 한 10일쯤 있다가 군인들이 인자 허용을 해서 할머니 시체 찾을라꼬 현장에 갔으요. 그래 작은아버지하고 저하고 둘이서 그래 지게를 짊어지고 그래 박산골에 한 50m 접근하니까, 그때, 마 아침 9시쯤 됐습니다. 까마귀 떼가 마 하늘을 하니 돌더라고요. 이런 변이 어디 있냐 하고 지게를 벗어 놓고 현장에 갔습니다. 가니까 새카마이 탄 내(탄 냄새)가 나. 머리카락은 다 탔고, 또 눈은 까마귀들이 다 빼먹어뿔고 없고.

그래도 할머이를 찾을 욕심으로 고 현장까니 내려갔으요. 내려가가지고 보니까 한 30대 돼 보이는 어떤 부인은 애를 딱 안고 이래 죽어 있고, 또 어떤 남자는 보니까 장딴지는 살이 다 타삐고 뼈만 남아 있고, 누가 누군지 도저히 구분이 안돼요. 그래서 작은아버지하고 저하고 둘이서 통곡을 하면서 할머이 시체 찾을라꼬 (시체) 한 여남은 구를 디비봤습니다(뒤져봤습니다) 디비보니까(뒤져보니까) 한참 밑에 보니까 바짝 통조림이 돼가 있으요. 겹겹이 돼 있데. 그래서 도저히 몬 찾는다. 찾기는 어렵고 하니까 포기하고 돌아가자꼬 그랬으요.

그래 돌아오는데, 누가 오드만요. 그래 그 사람 이름이 기억이 잘 안납니다마는 그래 저희들이 이제 설명을 했지요. “가봐야 못 찾으니까 도로 돌아가자.” 그래서 도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데, 식량에 여게(배개마을에) 있기 때문에 또 심야를 기해 가지고 작은아버지하고 저하고 밭에다가 식량을 좀 묻어놓은 거를 지게를 지고 넘어왔으요. 저는 우에 이짝으로 얹고, 작은아버지는 나락을 한 가마니 짊어지고 밤 11시쯤 돼 도착해 가지고 동네 밖에 한 200m 나가니까 총소리가 나는 기라. 그때 마을 뒤에 회계라고 있는데, 거게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모양이죠? 그래 그 어린 나이에 나락은 한 가마니 짊어지고 한번도 안 쉬고 넘어 갔어요. 그래 저는 반쯤 탄 나락을 짊어지고 가가지고 식량을 하고.

그래 가지고 5월달쯤 돼서 군인들이 와서는 농사를 짓도록 허용을 해 줬어. 그래 저하고 작은아버지하고 숙모하고 넘어와가지고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와가지고 전에 살던 집 우에다가 지붕을 만들고, 이래 가지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경찰 역임하고 유족회 회장 맡아

그래 2~3년 있다가, 그 당시에는 풍년이 들어서 온 고을이 잘 됐으요. 묵고 살기는 뭐 별로 어렵지 않게 살았습니다마는 그러다가 제가 스무살 때부터 목수 일을 좀 했습니다. 대문 일을 해가지고 고향에서 한 집을 한 대여섯채 지어 가지고 거 번 돈 가지고 그래가 산청으로 나갔습니다. 단독으로 내 혼자서. 그래 거 가서 인자 중학교 입학하고. 저는 스물 두 살에 중학교 1학년에 입학했습니다. 그래 2학년까지 마치고 3학년에 진학할 낀데, 나이가 많아서 안하고, 더 공부는 해야 되겠고, 그래가 인자 고학 생활을 해 가면서, 장평농업고등학교에 시험 치가지고 합격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 가지고 고학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가 도저히 혼자 힘으로 학교에 댕기도(다녀도) 돈도 없고 해서 2학년에 중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래 결혼해 가지고 63년도에 경찰에 들어와 가지고 31년간 경찰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퇴직을 했습니다. 그래 저는 2000, 2001년도에 지금 회장님이 그때 총무하고 제가 인자 유족회 회장을 맡아 가지고 2년간 회장직을 보면서 서울에도 마이(많이) 다니고. 국회,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에 다니면서 거창사건 너무 억울하니까, 좀 우리 살아남은 유족들 좀 보상을 해 달라꼬. 2000년도에 보상특별법을 국회에다가 상정을 해 놓고 있는 그런 상태입니다.

 

시체가 장작처럼 쌓여 있어

Q) 산청으로는 언제 가셨어요?

먼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가 목수일 좀 배와가지고 돈 좀 모았기 때문에, 나도 좀 배워야 되겠다고 해서 집안 어른한테 한문을 조금 배왔습니다. 명심보감 한 반쯤 외우다가 된통 어렵고 해서 때려치우고, 그래 인자 돈 좀 모아 가지고 늦게나마 스물 두 살에 인자 중학교, 사립학교에 입학해 가지고, 고등학교 중퇴하고 말았지만요.

우리 장인어른이 인자 일본에서 2차 대전 때 오사카에서 상업전문대학 나오고 해가지고 멀리 장개(장가)를 오셔가지고 산청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밥 먹을 데가 없어서 장인한테 가서 사정을 했지요. “밥이나 먹이주면은 내 혼자 벌어가 공부할 테니까 밥만 멕여주십쇼.” 하고 그라면서도 또 농사일도 마이(많이) 하고 그랬어요, 제가요.

농사도 지어 주고 그 가서도 집도 한 대여섯 채 짓고 해서 돈 좀 마이 모았어요. 모아 가지고 2학년 1학기 마치고 나니께 더 의욕이 안납디다. 부모도 일본에 계시제 그래서 고마 휴학계 내고 말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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